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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 삼인대(淳昌 三印臺)와 절의탑(節義塔)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5. 20. 20:49

    순창 삼인대(淳昌 三印臺)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1506(연산군 12)에 박원종(朴元宗, 1467~1510)·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주동하여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박원종 등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에 반대하였다며 숙청하였고,

    이어 신수근의 딸인 중종(中宗)의 비 신씨(愼氏)를 폐위시켰다.

    중종(中宗)은 윤여필의 딸(장경왕후)과 재혼하였으나 장경왕후는 왕자를 낳고 사망하였다.

    이에 순창군수 김정(金淨, 1486~1521)과 담양부사 박상(朴祥, 1474~1530),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은

    강천산에 모여 관인(官印)을 나무에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김정과 박상, 유옥이 각자의 관인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삼인대(三印臺)라고 부른다.

    김정 등의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후일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왕후(端敬王后)에 추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경왕후는 1699(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가 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別廟)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이후 1740(영조 16)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追上,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존호를 올리는 것)하고 태묘(太廟)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溫陵)이라 하였다.

    순창 삼인대(淳昌 三印臺)는 대의를 지키려는 이들의 선비 정신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를 기리고자 1744(영조 20)에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삼인대비를 세웠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 271








    순창 삼인대비(淳昌 三印臺碑)


    삼인대비는 정면 1,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다.

    이는 164, 폭은 80, 두께는 24로 화강암 좌대에 대리석 비신이다.

    비각 안에는 영조(英祖정조(正祖)의 어제 현판과 기우만이 쓴 삼인대 비각 중수기가 걸려 있다.

    비문은 도암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썼다.

    비문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창군수 충암(冲庵) 김정과 담양 부사 눌재(訥齋) 박상, 무안 현감 석헌(石軒) 유옥이 이곳에 모여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중종반정 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하여 삼인대라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부인 신씨를 중전에 올렸으나 훈신 박원종 등이

    중전의 아버지인 좌의정 신수근이 중종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므로 그 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우려하여

    신씨를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니 이분이 장경 왕후였다.

    그러나 10년 후에 장경 왕후가 승하하니 이때 많은 재이(災異)가 발생해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널리 구하니,

    이때 충암 등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한편

    훈신들이 군부(君父)를 흔들며 국모를 폐위시켜 추방한 죄를 논열하였다.

     

    상소가 접수되자 대간 이행(李荇) 등이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국(相國) 정광필(鄭光弼)이 힘껏 구명해 준 데 힘입어 도형(徒刑, 죄인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형벌)에 처해진 뒤

    귀양 가는 것에 그쳤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처음 상소문의 초안을 잡을 당시 관직에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세 사람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었다 하나 상소문에는 유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김정과 박상 두 사람이 유옥에게 우리들이 모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네만

    자네는 형제가 없어 자네 말고는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죽으면 효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네라고 하여 빠진 것이라 한다.

    이후 1699(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가 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그 후 1740년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하고 태묘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이라 하였다.

    이때 두 분도 모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고 자손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한다.










    절의탑(節義塔)






    절의탑비(節義塔碑)


    순창(淳昌)은 예부터 절의(節義)의 고장이라 부른다

    그것은 조선 초(朝鮮 初)에 두문동(杜門洞)에서 순절(殉節)했던 72() 중 순창인(淳昌人)이 다섯 분이요,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많은 국란(國亂)이 있을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 바친 선현(先賢)들이 그 얼마였으며

    근세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시초(始初) 병오창의(丙午倡義)가 우리 고장 순창에서 시작되었다

    더욱이 순창은 조선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비(愼妃)의 복위상소(復位上疏)

    당시 순창군수(淳昌郡守) 충암 김정(沖庵 金淨), 담양부사(潭陽府使) 눌재 박상(訥齋 朴祥),

    무안현감(務安縣監) 석헌 유옥(石軒 柳沃) 삼선생(三先生)께서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하였던 곳으로

    삼선생의 절의비(節義碑)와 각()에는 영조(英祖)의 어서(  ) 등이 보존 되어 있는 삼인대(三印臺) 앞에

    삼인문화선양회(三印文化宣揚會) 600여 회원이 뜻을 모아 순창의 300개 마을에서 2개씩의 돌을 모아 탑()을 쌓으니

    순창군민의 뜻이 응집된 절의탑(節義塔)으로 순창의 역사와 함께 영원할 삼인대(三印臺) 앞에

    불변의 상징돌의 기운이 쌓이고 또 쌓여서 새로운 형태로 웅기(雄起)하였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因緣),

    변질된 가치관(價値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수용하고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씨 한 톨을 얹었으니

    온 세상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순창 절의정신(節義精神)의 탑으로 솟아 있도다

    지나가는 길손이여옷깃을 여미고 순창의 절의정신을 찬양하소서. 아니 그대의 소망을 이 탑에 기원하소서.  

    삼선생(三先生)과 단경왕후(端敬王后) 그리고 순창선현(淳昌先賢)의 혼()이 감응(感應)할 것입니다.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국가민족의 융성과 여러분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삼인문화선양회 모든 회원은 두 손 모아 기원하면서 이 탑을 쌓습니다.


    단기(檀紀) 4336(2003) 827일 삼인문화선양회(三印文化宣揚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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