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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6. 5. 05:14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자운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로 숙종 9(1683)에 세워졌다.

    비는 서원의 내삼문 밖 우측에 있는데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올렸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예서체(隸書體)로 썼고,

    머리글(비의 명칭)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율곡 이이유적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


    자운서원은 율곡(栗谷) 선생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선생은 덕수이씨, 이름은 이(), 자는 숙헌(叔獻)이다.

    아버지는 감찰 원수(元秀)요 어머니 평산신씨는 글을 잘하고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꿈에 용이 잠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선생을 낳았기 때문에 어려서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15361226일에 출생하였다. 재주가 뛰어나서 7살에 벌써 글을 지었고,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 우연히 불교서적을 보다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감동된 바 있어

    마침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전심으로 불교의 진리를 탐색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에 크게 깨닫고 다시 유학에 힘을 기울였다.

    26세에 사마시와 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정언, 이조좌랑을 지내고 1561년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홍문관교리가 되어 평소의 주장을 개전해 보았으나 아직 학문을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해주 고산에 있는 석담(石潭)에 서재를 짓고 공부할 장소를 마련하였다.

    1571년에 청주목사로 있다가 다시 직제학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선생이 진언하는 것은 모두 옛날의 이상적인 정치를 재현할 것을 주장하였고

    임금인 선조는 그것이 실정과 부합되지 않는다하여 받아 들이지 않았다.

    뒤에 왕명에 의하여 사서의 주석을 정리하였고 또 성학집요를 편찬하여 올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심의겸과 김효원간의 반목으로 당쟁이 시작되는데

    선생은 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두 사람을 모두 지방으로 내보내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선생도 벼슬을 그만두고서 석담으로 돌아가서 주자가례에 의한 가족윤리를 재현하고 배우기 위하여

    모여드는 학자들을 위하여 격몽요결을 지어서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확립시켰고

    향약을 세워서 교화사업을, 사창을 설치하여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1580년에 선조는 다시 선생을 불려들여 대사헌에 임명하였고 선생도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정부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의욕을 갖었으나 당쟁으로 관료들의 의견이 분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호조판서로 대제학을 겸임하여 경제사를 신설하여 묵은 폐해를 일소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 찬성에 승진하여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렸다.

    다시 병조판서로 옮겨서는 군제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또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대에 부닥쳐 모두 좌천 되었다.

    선조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귀양 보냈으며 선생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마침내 1584116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파주 두문리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규모가 크고 범위가 넓어 옛것에 얽매이지 아니하며 세속적인 것에 물들지 않았다.

    큰 책임을 맡아서도 자신을 가졌으며, 어려운 문제에 부닥쳐도 서슴없이 처결하였다.

    주자 이후에 학설이 갈래가 많았으나 선생은 먼저 그 기본원리를 파악했기 때문에

    모든 학설을 명쾌하게 분석 비판하여 후학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 주었다.

    파주는 선생의 선대묘소가 있었고 또 선생이 묻힌 땅이므로 후학들이 여기에 서원을 지었고 효종께서 자운이라는 액호를 내리였다.

    송시열이 지어 1683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1979

    임창순 지움, 신일수 씀, 경기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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