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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곡이이선생상(栗谷李珥先生像),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6. 1. 20:30

    율곡이이선생상(栗谷李珥先生像),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判官) 의석(宜碩)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 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烏竹軒)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중종 38)8세때 화석정시(花石亭詩)’

    1545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1548(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1551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하였고 1557(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7월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형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율곡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社倉設置), 대동법(大同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4(선조 17) 음력 116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 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1624(인조 2)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숙종 7) 문묘에 배향 되었다





    율곡 이이(1536~1584) 동상


    이율곡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빛내신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요 정치가다.

    1536 음력122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584년 음력 116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

    든 정성을 다하여 자립과 협동이 삶의 길임을 몸소 본보여 주신 스승이다.

    깊고도 명쾌한 이론 전개에서 겨례의 뛰어난 정신을 대표하셨고,

    인생을 위하여 실제로 할일을 궁리하는 새로운 학풍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대한 경륜을 실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나라의 형세가 떨치지 못함을 염려하여

    10만의 군사를 미리 길러 환란에 대비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병석에서 까지 국방의 전략을 가르쳤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꿈속에서 말하듯 되풀이한 것을 오직 나라 일 뿐이었다.

    맑고도 높으신 선생의 덕이여경포대부의 다음 한구절 그대로다.


    " 하늘은 높고 높아 더욱 멀고, 달은 밝고 밝아 빛을 더 하더라"




    조각 김정숙

    글 박종홍

    글씨 이기우

    전면글씨 이양구

    서기 196988

    애국선열조각건립위원회, 서울신문사 세움

    이양구 바침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 어머니는 용인이씨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平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의 선조 때부터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때때로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으며 이런 와중에 셋째 아들인 율곡 선생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 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기도 했다.

    그의 주된 그림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梅花), 난초(蘭草), 산수(山水) 등으로

    이런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였다.

    한 예로 풀벌레를 그린 그림을 마당에서 여름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다가와

    산 풀벌레인줄 알고 잡아 먹으려다 종이가 뚫어질 뻔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의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집안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도량 넓은 남편을 만난 점 등은 그의 재능에 힘이 되었고, 그러한 인간애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가운데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셋째 아들 이()로 훗날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한 넷째 아들 우()와 큰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신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갸륵한 부인으로 그 이름은 자못 높다.

    이조 연산조 10(1504) 강원도 강릉땅 북평마을에서 신명화의 딸로 태어나 명종 6(1551)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침공(鍼工)이나 자수(刺繡)에 능할 뿐만 아니라

    글을 배워 경전에 능통하고 붓을 잡으면 글씨와 그림이 범상하지 않으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자라서 이원수에게 출가하여 온갖 어려움을 달게 참아가며 구고(舅姑)를 모시고

    남편을 슬기롭게 섬겼으며 사남 삼녀의 어머니로서 자녀를 힘서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 명현으로 손꼽는 율곡 이이 선생은 바로 이분의 셋째 아들이나 어머님의 뒷받침이 컸음은 물론이다.

    이분이야 말로 부모에게는 효녀요, 남편에게는 현숙한 아내요, 자녀에게는 어진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고 그림 또한 명화였으니 어찌 장하지 않으랴

     




    조각 최만린

    글 이서구

    글씨 이철경

    전면글씨 이학수

    서기 19701014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 서울신문사 세움

    이학수 바침

     





    율곡이이선생상(栗谷李珥先生像),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


    율곡이이선생상, 신사임당상은 1969년과 1970년 서울시 종로구 사직공원내에 건립돼 보존되어 오다가

    사적 제121호인 사직단 복원계획에 따라 이곳 파주 이이 유적지로 이전 복원하고 20151010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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