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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4. 05:37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


    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된다 하여 학봉의 8대손 광찬(光燦)1762년에 이곳에서 100m 떨어진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1964년에 종택을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 때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자리잡은 이 종택은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좌측에 정침과 그 뒤쪽에 사당이 있고, 마당 건너편에는 근년에 지은 운장각과 정자가 서북향으로 나란히 앉아있다.

    정침은 자에 양익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 좌측에 직각으로 자 아래채를 달아내어 사()자형으로 바뀌었다.

    침 정면 우측에 사랑채가 돌출형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마루가 2, 방이 2, 작은 사랑방 2, 1칸 책방을 놓아 안채의 우익사에 연결하였다.

    안채는 우측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좌측에는 2칸 안방을 두고 끝에 부엌을 놓았으며

    그 앞쪽의 좌익사는 식당 등으로 내부가 개조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3칸의 사당을 배치하고 토석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 (금계리)









    운장각(雲章閣)


    힉봉 종택(鶴峯 宗宅) 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운장각은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유물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1987년에 개관하였다.

    운장(雲章)저 높은 은하수처럼(倬彼雲漢 탁피운한),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爲章于天 위장우천)”라는

    중국 최고(最古) 시집 시경詩經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운장각에는 왕에게 학술을 강의하고 토론한 내용을 기록한 경연일기(經筵日記), 기행문인 해사록(.)

    김성일의 친필 원고와 안경, 벼루를 비롯한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역사서인 사기(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같은 조선 초기 간행한 고서(古書) 56261점과

    왕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서(敎書), 군사 지휘권에 관한 명령서인 유서류(諭書類) 등의 고문서 17242점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서 중에는 국가지정보물도 있다.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 제906)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유적이 소장되어 있다.








    풍뢰헌(風雷軒) - 별채


    풍뢰헌은 누각 형태로 앞면 4칸에 가운데 2칸은 마루를 깔고 좌우 한칸씨 온돌방을 넣었다.

    그리고 툇마루를 길게 달아내었고 난간을 둘렀다.

    특이한 것은 처마 끝의 긴 서까래 위에 짧고 네모진 며느리 서까래를 다시 잇대어 단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이는 왕이 머무는 곳을 뜻하며 궁궐이나 별궁 이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이 집은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살았던 곳이다.

    학봉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선조(宣祖) 1(1568)에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오자

    영조(英祖) 38(1762)에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그후 1964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이 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종택으로서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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