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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壬亂殉國無名四百義兵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8. 10. 24. 18:09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壬亂殉國無名四百義兵碑)
임진왜란 당시 1592년 8월 27일(음력) 이치전투 400명의 무명의병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1만 여명에 맞서
이보, 소행진, 황박 등의 지휘하에 활, 칼, 낫, 돌 등으로 백병전을 벌이다 전원 순국한 농민의병이다.
이들의 결사항전으로 전주성을 지키고 호남 곡창지대를 왜군의 수탈로부터 막아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무명 400 농민의병의 순국 사실은 그동안 권율 장군과 황진 현감의 이치 전승기념비에 가려 묻혀 오다
조원래 순천대 명예교수와 나종우 전북역사문화학회장, 이해준 공주대교수, 이종철 전 전통문화대총장 등에 의해
추념사업이 추진되어 2016년 3월 19일 이치재에 ‘임란순국 무명사백의병비’를 건립하여 제막식을 개최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복리 산15-3번지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壬亂殉國無名四百義兵碑)
이곳은 임진년 잔악무도한 왜적의 침입 앞에 이 땅의 의로운 사람들이 기꺼이 온 몸을 던진 순국(殉國)의 현장이다.
이름 없는 사백 의병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배고개 이치(梨峙) 이 자리에서 거룩하게 스러져 갔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군은 불과 20일이 채 못되어 한양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부대는 남으로 말머리를 돌려 6월 23일 금산성을 점령했다.
왜군은 호남의 수부인 전주를 목표로 이치를 넘고자 하였다.
하지만 호남지역의 의병과 관군은 끈질긴 항전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풍전등화의 곡창지대를 방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치전투는 두 차례 치러졌다.
권율 장군과 황진 장군이 이끄는 관군의 주력부대가 승리를 거둔 7월9일 전투는 세상에 자세히 알려졌다.
하지만 의병이 주도한 8월 27일 전투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묻혀지고 있다.
그것이 아쉬어 이 비를 세워 바로 알리고자 한다.
8월 전투는 금산성 탈환을 위한 전투에서 의병과 관군이 도륙당한 뒤 벌어졌다.
사백 의병은 멸사봉공의 정신 하나로 사지(死地)에 나섰다.
익산 선비 지평공 이보(持平公 李寶)와 소행진(蘇行震)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끌었다.
손수 마련한 병장기를 들고 이치를 지키던 의병들은 왜적과 아침부터 한낮에 이르기까지
맞서 싸우다 화살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모두 함께 순국하였다.
이치의 사백 의병은 밀려오는 왜적에게 “너희들에게는 우리 땅을 한 치도 내줄 수 없다.”고 외쳤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살리고 후손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몸을 던졌으니
그 충성스럽고 곧은 절개가 해와 별같이 빛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제 이 비를 세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국 의병들의 고혼(孤魂)을 달래고자 하니 조국과 민족의 품에 고이 잠드시라.
2015년 10월 2일
전 원광대교수 문학박사 전북문화재위원장 나종우 삼가 지음
주관 : 완주군, 전북역사문화학회
기록화 : 김학곤, 비명글씨 :김진돈
비건립추진위원 : 이종철, 서동철, 이해준, 나종우, 조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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