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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天地人) 중에서 가장 으뜸인 사찰, 계룡산 갑사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8. 11. 1. 06:36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찰, 갑사(甲寺)
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명산 계룡산(鷄龍山)의 서편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제(百濟) 제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인 420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통일 신라시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천여 칸의 당우(堂宇)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으로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크게 번창하였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왜구들에 의하여 소실된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과 효종(孝宗) 5년(1654년) 개축과 중수를 하게 되었고
고종(高宗) 12년(1875년) 대웅전 등이 중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년고찰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靈圭大師)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
표충원, 영규대사 기적비 등의 영규대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전각들도 볼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갑사로 567-3 (중장리)
갑사 일주문(甲寺 一柱門) -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갑사구곡(甲寺九曲)
일제강점기 때 윤덕영이 계룡산에 들어와 간성장(艮成莊)이라는 별장을 짓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절승을 이룬 곳마다 큰 바윗돌에 구곡 경물을 설치.
개인의 풍류취향을 반영, 주역의 이치를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고 즐김. 용과 닭을 주제로 계룡산의 장소 정체성 부각
제1곡 용유소(龍遊沼) - 용이 노니는 소(沼 )
제2곡 이일천(二一川) - 수정봉과 연천봉 발원, 계곡물의 합수지점
제3곡 백룡강(白龍岡) - 여름 우기에 물보라가 마치 흰용이 꿈틀대는 것과 같은 곳.
제4곡 달문택(達門澤) - 연못으로 배를 띄워놓고 풍류를 즐긴 곳.
제5곡 금계암(金鷄巖) - 금계포란 (金鷄抱卵) 또는 천조 (天鳥)인 닭, 새벽을 알림.
제6곡 명월담(明月潭) - 달 밝은 밤 잔잔한 물위에 비치는 달빛이 마치 하늘이 물속에 있는 듯 한 절경.
제7곡 계명암(鷄鳴巖) - 계룡산이 처음 열릴 때 산속에서 닭이 날개짓을 하며 울었다고 하는 바위.
제8곡 용문폭(龍門瀑) - 자연 폭포로 약 10m 정도의 낙수광경이 절경인 폭포.
제9곡 수정봉(水晶峯) - 산봉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백색을 띈 암석으로 피라미드형이 바위산.
갑사 자연관찰로
갑사 사천왕문(甲寺 四天王門)
사찰의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사천왕(天王門)을 맞이하게 되는데
천왕문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위엄을 지닌 사천왕상 내지는 사천왕도상을 접하게 된다.
사천왕을 인도 신화에 나오는 호세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호세천(護世天)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불교에 받아들여졌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형상화된 사천왕상은 간다라 출토의 부조(浮彫)나 부처님 생애를 그린 불화(佛畵) 등에는
귀인(貴人)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인형(武人形)의 사천왕으로 변해 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천왕(四天王)은 욕계6천(欲界 6天)의 제1사왕천의 주인이자 수미(須彌)의 4洲를 수호하는 신(神)이다.
수미산 중턱 4층급을 주처(住處)로 하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천왕(天王).
즉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을 동서남북에 각각 배치한 것이다.
송국 지엄역(宋國 智嚴譯),『四天王經』에 의하면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의 명을 받아
4洲에 내려와서 중생들의 선악을 은밀하게 살펴보고 이를 보고하는 신(神)이라고 한다.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도상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물(持物)이 일정하지 않으나
다문천은 손에 항상 보탑을 들고 있어 사천왕의 명칭을 확인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며
대체로 칼과 창, 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갑사 강당(甲寺 講堂)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갑사 대웅전(甲寺 大雄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정면 5칸(15.98m), 측면 3칸(9.89m)의 맞배지붕의 다포집. 높이 1.8m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가운데 3칸에는 띠살문의 사분합(四分閤) 쌍여닫이문이 있고
양 옆 협간(夾間)과 측면 앞 칸에 분합문(分閤門: 마루나 방에 설치한 큰 문)을 달았다.
배흘림을 준 둥근 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고나서 그 위에 주두(柱頭)를 놓았다.
공포(栱包)는 안팎 3출목(三出目)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에는 2개씩, 양 협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내고주(內高柱)를 세우고 그 위에 동자기둥(童子柱)을 얹어 마루보를 받쳤으며,
이 마루보에 의지하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내부는 트인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내고주열(內高柱列)에는 후불벽(後佛壁)을 만들고 그 위쪽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갑사 삼성각(甲寺 三聖閣)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있는 사당 형태의 건축물이다.
대개 이 삼성을 따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갑사에서는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지붕 구조는 간단한 3량집이다.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만든 기단 위에 사발을 엎어놓은 듯이 잘 가공된 복발형(覆鉢形) 초석을 놓았고,
배흘림이 없는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식 포를 짜 올리고 그 위에 대들보를 끼워 올렸다.
기둥 머리의 경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방을 걸었고, 초익공 살미 안장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보모리 끝에는 봉황을 조각해 끼워두었다.
각 칸의 창방 위쪽에는 소로를 끼운 화반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걸친 다음 서까래를 올려 걸어 지붕을 마감하였다.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두었으며, 창호는 정면 3칸에만 각각 세살분합문을 달아두었다.
기와지붕에 막새는 쓰지 않고 와구토로 마감하였다.
갑사 공우탑(甲寺 功牛塔)
탑(塔)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하면서
솔도파(率堵波)·솔탑파(率塔婆)라 부르다가 탑파·탑이라고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원의 중심에 하나의 탑을 세워 불사리를 봉안하였으나,
이후 탑을 두 개로 나누어 세우기도 하고, 사원의 중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세우기도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탑에 불사리 외에도 불상이나 불경 등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갑사 공우탑의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갑사 소속의 한 암자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나, 그 암자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탑신에 ‘우탑(牛塔)’, ‘공(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사찰 중건에 공이 컸던 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우탑은 지면에 자연석 2단을 조성한 후 기단을 만들었다. 기단은 갑석 모양으로, 판석 1매에 탑신 받침을 새겨놓았다.
탑신 받침 위에 1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올렸다.
2층 탑신은 1층 탑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높이와 폭을 줄여 올린 다음 2층 지붕돌을 올렸다.
3층 탑신은 2층 탑신에 비해 작고 지붕돌이 덮여 있다.
각 층의 탑신에는 우주(隅柱)를 새겨두었는데, 1층 탑신과 3층 탑신의 우주 폭이 같다.
이 때문에 우주 폭이 같아도 3층 몸체의 우주는 매우 커 보인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둥근 원판 위에 공 모양의 상륜부를 만들어 마감하였다.
갑사 대적전(甲寺 大寂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조선 후기의 요사(寮舍)건물로 정면 3칸(8.63m), 측면 3칸(7.41m)의 팔작지붕의 다포식(多包式) 건물.
높이 60㎝ 가량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돌 위에 둥근 홈을 새겨 주좌(柱座)를 표현하였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十자 모양으로 짜맞추고, 그 위로 건물 앞쪽에서는 안3출목,
밖2출목의 공포(栱包)를 짜올렸는데, 건물 뒤쪽에서는 공포(栱包)를 생략하였다.
건물 외부에서 보면 앞쪽 가운데 칸에 4분합문(四分閤門)을 달고 그 위쪽에 공간포(空間包)를 배열하였다.
양 옆 칸과 측면 앞쪽 칸에는 2분합문을 달았으며 문살은 모두 띠살로 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통칸으로 바닥에 널마루를 깔고 내고주(內高柱)를 세웠다.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우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으며,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문수보살·보현보살을 안치하였다.
지붕 가구(架構)는 고주 위에 동자기둥(童子柱)을 놓고 다시 여기에 마루도리를 얹어 우물천장을 받치도록 하였다.
한편, 단청은 특이해서 천장에 연꽃무늬와 태극선 모양의 파문(巴文: 태극무늬)을,
대들보에 물고기를, 앞쪽 창방에 신선도를, 평방에는 개와 고양이 그림을 그렸다.
갑사 대적전은 임진왜란 당시 사찰이 전화로 전소될 때 없어진 이후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다.
앞면 어칸에 걸린 현판에 ‘도광육년사월목암서(道光六年四月牧岩書)’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826년(순조 26)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갑사 승탑(甲寺 僧塔) - 보물 제257호
승탑이란 승려들의 유골을 안장한 묘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초에 처음 나타난다.
팔각형의 지붕을 가진 팔각원당형으로 되어 있는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일 뿐만 아니라
조각 솜씨도 뛰어나 신라 말기와 고려초기의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갑사 뒷산의 중사자암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의승장 영규대사(義僧將 靈圭大師)
천지가 유린되는 임진왜란 말발굽에 칡넝쿨 마디마다
의병꽃 피어나고 풀잎도 날세워 싸움터로 향할 때
장삼을 방패삼아 낫들고 일어나서
빗발치는 조총알을 몸으로 막으시며 부러진 낫끝으로
청주성 탈환하신 거룩하신 대사님이시여!
여기! 그 날의 함성모아 님 곁에 묻습니다.
영규대사 토굴지 입구(靈圭大師 土窟址 入口)
경로효친사상선양비(敬老孝親思想宣揚碑)
갑사에 오면 (박정란)
흔들리는 나뭇잎
숲 사이사이 하늘의 구름
보이는 모두가 꽃이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들리는 모두가
노래였다.
아!
스무살 그때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420)에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위덕왕(威德王) 3년(556)에 혜명대사(惠明大師)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그 후 신라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중수하여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영하였다.
현재 대적전 주변의 정교한 초석, 승탑 (보물257호), 철당간 (보물256호)등에서 당시의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침입한 왜군들에 의하여 사찰이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 대웅전 중건을 시작으로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효종 5년(1654)에 증축이 크게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국내 나들이 > 사찰(寺刹), 불교(佛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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