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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서,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1. 9. 06:32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서,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


    지영록 - 보물 제2002(20181030일 지정)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1633~1704)

    1694(숙종 20)7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이래 1696(숙종 22) 9월까지

    재임기간 중의 업무와 행적,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서명인 지영록(知瀛錄)’에서의 ()’영주(瀛州)’를 의미하며 이는 제주의 옛 지명이다.

    서문에 의하면 이익태는 제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알게 된 제주도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참고하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겼다.

    수록된 내용은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의 여정, 재임기간 중의 공무수행, 제주도 부임시의 행적과

    그 과정에서 지은 시·제문·기행문 등이며, 특히 조선인 또는 일본인의 표류(漂流)에 관한 기록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그 중 1687(숙종 13) 8월 김대황(金大璜)이라는 제주도민이 출항 후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安南)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내용인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은 조선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다.

     이익태 지영록은 제주도의 문화 및 지명 등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외국인의 표류 상황에 관한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표류민 정책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또한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이형상(李衡祥, 16531733)환박물지(南宦博物誌, 1704)’보다

    8년이나 빠른 것으로, 연대가 가장 앞서는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국립제주박물관 전시관에서 -

     



    지영록(知瀛錄) - 보물 제2002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가 제주목사를 지내면서 탐라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제주와 관련된 것을 쓴 책이다.

    지영록은 17세기 제주 역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록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의 과정,

    재임시의 업무, 제주 역사자료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부록으로 숙종 시기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 등의 외국인 표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이익태(李益泰)의 교지(敎旨)


    1694(숙종 20) 이익태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될 때 받은 교지이다.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이익태는 1694~1696까지 제주목사로 있었다.

    62세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관덕정(觀德亭), 운주당(運籌堂), 우련당(友蓮堂), 향교(鄕校) 등을 중창하였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다.




    이익태 초상(李益泰 肖像) - 조선 17세기 후반


    이익태의 초상화로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상과 높게 그려진 사모는 17세기 후반 공신도상의 새로운 특징이다.

    그러나 승려상에서 보이는 손을 표현한 점, 다리를 올려놓는 대를 화려하게 채색한 점,

    의자 다리를 어색하게 표현한 점 등은 당시 공신상의 일반적인 양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익태(李益泰, 1633~1704)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裕). 아버지는 이돈형(李惇亨)이다.

    1668(현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4(현종 15) 5월 전라북도 용안현감에 부임하여 1675(숙종 1) 12월 사임하였다.

    1694(숙종 20) 이기하(李基夏, 1646~1718)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96(숙종 22) 9월에 물러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694년에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연무정(演武亭)

    유사시 제주목사가 제주성 방어를 총 지휘하였던 운주당(運籌堂)을 중창하였다.

    또한 선조의 어필(御筆)을 개간하여 모든 관청의 관문에 액자로 만들어 게시하였다.

    제주성에 한학(漢學왜학(倭學)의 역생(譯生) 등의 호적을 보관하는 삼학청(三學廳)을 창건하였으며,

    1695(숙종 24) 봄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다.

    귤림서원은 1682(숙종 8) 신경윤(愼景尹) 제주목사가 개원한 이래 김정(金淨, 1486~1521) ·

    송인수(宋麟壽,1487~1547) · 김상헌(金尙憲, 1570~1652) · 정온(鄭蘊, 1569~1641)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지영록(知瀛錄)’연무정중수기(演武亭重修記)’가 있는데, 모두 제주목사 재임 중에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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