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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독교 복음전래지, 백령도 중화동교회(白翎島 中和洞敎會)국내 나들이/기독교(基督敎) 2018. 11. 10. 04:30
최초의 기독교 복음전래지, 백령도 중화동교회(白翎島 中和洞敎會)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세기의 바깥으로 밀려든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서해의 백령도가 속해있는 대청군도이다.
1898년 백령도 진의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이 복음의 씨앗을 받고,
그 곳에 유배 되어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에 중화동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중화길 230-7 (연화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중화동교회
白翎島 基督敎 信仰의 先覺者 翎起 許得公 紀念碑
(백령도 기독교 신안의 선각자 령기 허득공 기념비)
양천인(陽川人) 1828~1902, 수세성도(受洗聖徒)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通政大夫 同知中樞府事)
公(공)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남보다 뛰어났던 분으로
민족혼을 되살리고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 기독교의 바탕위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진보적 개화 정치인이었다.
公(공)은 세상에 어느 무엇보다 소중한 기독교 신앙을 백령도에 심어 놓고 가신 분으로
백령주민의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유훈(遺訓)
예수 잘 믿어라!!
韓國 基督敎 宣敎의 開拓者 聖禮式 執典 紀念碑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성례식 집전 기념비)
神學博士 宣敎師 元杜尤(신학박사 선교사 원두우, H.G. Underwood, 1859-1916)
中和洞敎會 尋訪(중화동교회 심방) 11.8~11.9
1900년 11월 8일 목요일(음력 9월 17일) 당시 백령도의 선교를 지휘 감독하던 언더우드 선교사 내외는
소래교회 여전도사 김씨 부인의 안내로 중화동교회를 방문하여 학습과 세례문답을 통과한 7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最初의 受洗者(최초의 수세자) 1900.11.8.
許得(허득) 許根(허근) 許權(허권) 許永佑(허영우) 金興甫(김흥보) 許倫(허륜) 허간(許侃)
허간 목사 기념비
대한예수교장로회 중화동교회 창립 백주년 기념비
기념비
1. 취지 : 백령도 8개처 교회 장로 35명은 기독교 창설 백주년을 맞으면서 불
굴의 신앙으로 교회를 사수한 성도제위에 빛난 업적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숭고한 신앙정신을 후대에 전하여 보전코저 이에 기념비를 설립함.
2. 교회창설과 발전과정 :중국 산동성 선교중이던 영국인 도마스 목사 순교전인
1865년 8월 13일 샤만호로 백령도에 와서 약 2개월 반동안 머물며 한문성서를 전하다.
그 후 : 1894년 갑오동학란 유배로 래도한 충청도 공주사람 김성진씨가 휴대했던 한문성경 1권을
중화동 허덕(허간의 조부)씨에게 전달되었고, 1896년 8월에 소래교회 서경조 장로를 초청하여
한문서당에서 창립예배를 드렸으니 이가 곧 중화동교회의 설립이요,
백령 각 교회의 설립 계기가 되어 백령도 10개처, 대청도 3개처, 소청도 1개처, 합14개가 교회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다.
옹진 백령도 연화리 무궁화(甕津 白翎島 蓮花里 無窮花) - 천연기념물 제521호
백령도 중화동교회 앞에 있는 연화리 무궁화는 높이가 6.3m로
국내에서 제일 크다고 알려져 있으며 모습도 빼어나다.
꽃잎과 꽃술 부분이 붉은 재래종으로 섬바람을 이겨내고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무궁화는 수명이 보통 40~50년이므로 수령이 100년 안팎인 연화리 무궁화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생활문화사적 가치도 아주 크다.
중화동교회 향나무
우리나라 최북단 교회, 백령도 중화동교회(白翎島 中和洞敎會)
백령도 기독교 역사 및 중화동 교회 역사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세기의 바깥으로 밀려든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서해의 백령도가 속해있는 대청군도이다.
대청군도와 인근해역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해상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816년 맥스웰(Murrey Maxwell)대령이 이끌던 선단에 클리포드(H.J.Clifford)해군 대위가 자비로 승선하여
각 지역의 언어를 수집하고 선교 가능성을 탐사하기 위해 백령도에 정박하여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1832년 칼 귀출라프(Karl F.A.Gutzlaff)가 영국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통역 겸 선상 의사로 승선하여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는 클리포드의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백령도에 정박해 있으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백령도에 임시 정박하여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고 기다리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 후 1898년 백령도 진의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이 복음의 씨앗을 받고
그 곳에 유배 되어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에 증화동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의 조선 입국보다도 50여년이나 앞서 복음의 씨앗이 백령도에 떨어졌고
조선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최초의 중화동 교회가 세워졌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백령도 중화동 교회 최초 당회장 언더우드 선교사
당시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지휘 감독하던 선교사 언더우드목사는 중화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었다.
그는 성경과 찬송가 번역, 대한성교서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사업 등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도중에 1900년 9월 26일경 평양을 출발하여 진남포, 은율, 풍천을 거쳐 소래에 도착했으며,
6주정도 지나 1900년 11월 8일 목요일(음력 9월 17일) 언더우드 목사 내외는 여전도사 김씨 부인의 안내를 받아
중화동 교회를 방문하여 언더우드 목사의 집전으로 7명에게 성례식을 베풀었다.
이날 세례자는 허 득, 허 근, 허 권, 허 륜, 최영우, 김흥보, 허간 등이었다.
한국 개신교 전래 역사
개신교가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한 것은 1832년 7월 17일에 독일인 목사 귀쯔라프(Karl F.A. Gutzlaff)가
백령도와 군산만에 기항하여 주기도문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한 때부터이다.
이때 감자씨를 도민에게 주며 그 재배법을 일러 주었고, 포도주 만드는 법도 알려 주었다.
또한 1873년에 로스(Ross)목사가 만주 전도여행 중 서간도의 한국인 부락을 방문하였고,
3년 뒤에는 한국 외초의 개신교 수세자(受洗者)인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 등이
만주 우장(牛莊)에서 머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수정이 1883년 4월 29일에 일본에서 역시 세례를 받았고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다.
이미 1875년부터 예수 성교(聖敎) 문답서를 비롯하여 신약성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일에
로스 목사와 협력하던 서상륜이, 1884년 초에 황해도 송천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를 세워 성서를 반포하기 시작했다.
송천(솔내)교회를 일컬어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요람'이라고 백낙준 박사는 말한 바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주재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인천에 상륙한 때(1884. 9. 20)보다 수개월 전에,
한국 토착민이 솔선하여 세운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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