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평대리 해안도로 도깨동산(제주 구좌)
    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8. 11. 17. 19:30

    평대리 해안도로 도깨동산(제주 구좌)















    불턱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거나 무자맥질해서 작업하다가

    언 몸을 녹이기 위하여 불을 피워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닷가에 돌을 둥그렇거나 네모지게 쌓아 만든 공간을 말한다.

    바닷가에 설치한 해녀들의 탈의장으로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현대식 탈의장이 생기면서 불턱은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식 탈의실이 생기기 이전에 해녀들은 물질 갈 때 질구덕에 태왁과 망사리, 비창, ‘호멩이

    물질 도구와 함께 불을 피울 지들커(땔감)’를 가지고 갔다.

    지들커를 많이 가지고 가면 어른 해녀들에게 착하다는 인사도 받고, ‘지들커가 시원치 않았을 때는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지들커는 바닷가에 설치된 불턱에서 물질을 한 후 언 몸을 녹일 때 사용한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언 몸을 녹이고, 물질하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해녀들의 공동체 공간이었다.

    해녀들은 또 불턱에서 마을과 가정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通政大夫 萬戶 夫公時興望思碑(통정대부 만호 부공시흥망사비)


    부대각(夫大脚) 이야기

       제주시(濟州市) 구좌읍(舊左邑) 평대리(坪岱里)에 부씨(夫氏)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부인이 하루는 이상한 꿈을 꿨다.

    하늘에서 황용이 내려와 부인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들 부부는 귀한 자식을 얻을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아닌 게 아니라, 부인이 아기를 가졌는데 어찌나 식욕이 좋은지 소 한 마리를 잡으면 며칠만에 다 먹는 판이었다.

    날이 차고 달이 차 해산을 하니 아들 쌍둥이었다. 아기 쌍둥이는 어찌나 큰지 모두들 놀랄 정도였다. 쌍둥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열 살 무렵에는 거의 열여덟 살 정도 된 소년만큼 우람할 뿐 아니라 힘이 세고 또 영리하기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다.

    그 아이들 부모는 사실 걱정이 됐다. 자식들 크는 양이 남들과 같지 않게 너무 빼어났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집안에 영웅이 나면 역적으로 몰리고, 역적으로 몰렸다가는 3족을 멸하였으니 부모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루는 부모가 쌍둥이 거동을 살폈다. 이웃 마을에 마실갔다 올 테니 잘들 놀고 있으라고 타이르고

    그들 부모는 집을 나섰다가 아이들 몰래 다시 집에 돌아와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던 것이다.

    쌍둥이는 부모가 나들이 간 줄 알고 저희끼리 노는데, 저마다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면서 노는 게 아닌가.

       쌍둥이가 옷을 활활 벗었다. 보니 가슴을 명주로 꼭 싸고 있었다가 그걸 푸니, 이게 웬일인가,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다니.

    쌍둥이는 날개를 펴서 파닥파닥 날개 짓 하면서 한 아이가 날면, 다른 아이도 덩달아 그 뒤를 따라 날았다.

    서로 날면서 잡히고 잡으면서 아주 신나게 놀았다.

    한참 그렇게 날개 짓을 하며 놀던 아이들이 방으로 내려오더니 날개를 접고 명주로 감싼 후 옷을 입고는 태연히 않았다.

    모든 걸 다 지켜본 부모는 자신들 걱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시름에 잠겼다.

    당시는 날개 돋은 아이가 집안에 나면 관가에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관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집안이 무사할리 만무였다.

    오래 시름에 잠겨 고민하던 부모는, 자식들의 날개를 잘라 버리고 우환을 미리 막고자 했다.

    쌍둥이 생일이 됐다. 부모는 생일상을 잘 차렸다. 맛있는 음식은 물론이고 술까지 준비했다.

    쌍둥이는 좋아라고 술이며,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아버지는 날랜 장도칼를 가져다가 작은 아들의 날개를 딱 찍었다.

    순간, 두 아들이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자신들의 날개를 부모가 절단하는 것을 알아차린 큰아들은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작은 아들은 형의 뒤를 따라 마당까지 날아갔으나 한쪽 날개를 잘렸기 때문에 더 날아갈 수가 없었다.

    큰 아들은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아들은 자랄수록 더욱 힘이 세어져서 세상에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커서 사공이 됐는데, 배를 한손으로 쳐들 만큼 힘이 천하제일이었다. 그가 바로 부대각(夫大脚)이다.

    후세사람들이 힘센 사람을 일컬어 부대가 자손이라 하게 된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연에서 유래한다.

    부대각은 실제로 평대리에 살았던 인물로, 그의 묘가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3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있다.

    부씨 가문의 가보(家譜)에 의하면 부대각의 본명은 부시흥(夫時興)으로서

    조선조 인조 4(1626) 어모장군(禦侮將軍) 벼슬을 지낸 아버지 부경필(夫景弼)과 어머니 숙인(淑人) 김해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무가(武家)의 혈통을 이어 받아 힘이 장사였으므로 세칭 부대각(夫大脚)이라 하였다 한다.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 4(1678)에 벼슬이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올랐으며

    훗날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만호(萬戶)를 제수하였다.

    그런데 당시 제주목사는 그의 6대조인 어모장군(禦侮將軍) 부유겸(夫有兼)의 묘가

    성산읍(城山邑) 오조리(吾照里) 식산봉(食山峰) 정상에 있는 장군석을 정면으로 비추어

    후세(後世) 희세(稀世)의 대장군이 태어난다는 설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장군석을 자르고 사람들이 경외(敬畏)하고 있는 부대각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부대각이 경관직(京官職)을 그만두고 "명월만호"가 되어 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주목사는

    부대각이 배를 타고 제주에 건너올 때 암계(暗計)를 써서 수장(水葬)시켜 버렸다.

    그의 늑지(勒旨)를 가진 종자(從者)의 배가 먼저 도착하고 부대각이 탄 배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행방이 묘연하였으므로

    훗날 그 애석한 사연과 그의 위적을 기리어 평대리 해변 "베드린개"에 비를 세워 추모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평대리(坪岱里) 중동 해안가 "도깨동산"에 세워진 그의 비에는 위와 같은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도깨동산


    파도에 밀려가서

    살아오길 여러날이였네

    힘쎈 부대각은

    깊은 바당을 떠도네

    도체비가 춤을 준다

    마음은 콩닥콩닥

    살암시민 살아진다고

    오늘도 마당에

    몸을 던져본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