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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성지,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8. 11. 21. 20:51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용수성지)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과연 당할 수 있으리이까!
"- 김대건 신부의 열아홉 번째 서한 中-
기념관 건립배경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비롭게 형성된 이곳 제주의 용수리 해안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귀국 시에 표착하여 첫발을 디딘 한국 천주교회사의 현장이다.
박해로 신음하는 조국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자 사제 서품 즉시 귀국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 일행을 섭리의 손길로 폭풍우 속에서 구해,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것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 해안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한 뒤,
타고 온 라파엘호가 수리되자마자 순교의 길로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박해의 칼날 아래서 천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이에 제주의 신앙 후손들은 이곳에 서려있는 하느님의 섭리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길이길이 새겨두기 위해 이 기념관을 세운다.
선대로 부터 이어온 신앙심과 순교정신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는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시골에서 낮은 관직을 얻었던 그는 두 차례의 체포와 석방을 겪었고,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1814년에 충청도 해미에서 옥사 순교하였으며, 1816년에는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마저 대구에서 참수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은 이후에도 얼마동안 고향인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송산면 우강리)에서 거주하였으나,
다시 박해의 위험이 닥치게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용인의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과
이웃의 한덕골(용인시 이동면 묵리의 굴암)은 일찍부터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으므로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아우인 난식(프란치스코)과 함께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을 먹고 자란 김대건 소년은 점차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순교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
김대건 신부는 21통의 서한과 1통의 순교 보고서, 2통의 작문, 1편의 조선전도 등 25건의 문서를 남겼다.
이 밖에도 3통의 서한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21통의 서한 중 마지막의 한글 서한은 <조선 교우들 보아라>라는 ‘회유문’이고,
한문 서한(1844년 12월)과 라틴어 서한(1846년 8월 26일자의 옥중 서한)은 현재 프랑스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회유문’ <조선 교우들 보아라>는 조선 교우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따르도록 부탁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 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
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서 잠시 사목한 뒤,
모친이 거주하던 용인으로 내려가 그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모든 활동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박해자들과 배교자, 밀고자들의 눈길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교우촌에 방문하여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미사를 드릴 시간도 없었다.
밤중에 교우촌을 찾아다녀야 하고 교우촌에 당도하면 복사를 시켜 교우들을 모은 다음,
벽에 고상을 걸고 성사를 준 뒤 곧바로 다른 교우촌으로 가야 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전송할 수도 없었고 집안에서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성사를 받은 교우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김대건 신부 또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순방을 계속하였다.
25세의 나이에 천상영광의 길로
1846년 6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을 돌아보던 김대건 신부는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옥중에서 영국의 세계지도 한 장을 번역하였고,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과 재능은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온갖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자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은 26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천상영광을 안았다.
이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하다.
“나는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죽은 다움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여러분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성 김대건 신부 흉상(聖 金大建 神父 胸像)
'김대건 신부 흉상'은 김신부의 얼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에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남성의 윤곽에 맞춰 찰흙을 붙여 청동 모형을 제작한 것이라 한다.
(1999∼2001. 가톨릭대 해부학교실팀 복원 자료)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었던 상복
조선에서는 상복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위로하는 뜻으로 모두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다.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은 서양인의 외모를 감추기 위해 이러한 상복을 착용하고 교우촌이나 은신처로 옮겨 다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J.J. Ferreol, 1808~1853) 주교와 다블뤼(M.A.N. Daveluy, 1818~1866) 신부 역시
라파엘호를 타고 충청도 강경 부근의 황산포로 입국할 때 이러한 형태의 상복을 입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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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첫 미사 봉헌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난 선장 김대건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신부 일행이 20여일을 표류한 끝에
1845년 9월28일 이곳 용수리 앞의 죽도(현 차귀도)에 정박하여 감사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
폐레올 주교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바랑 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여행의 목적지에 닿았고, 고생도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라파엘호의 고증기록
페레올 주교가 파리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에 따라 배의 구조를 살펴보면,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의 크기에 아주 높은 돛대 두개, 가마니로 이은 돛 두 폭이 달려 있고,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은 채 널판은 나무못으로 서로 이었으며 타마유나 틈막기도 전혀 없었다.
뱃머리는 선창까지 열려 있는데 이것이 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권양기 끝에 나무로 된 닻이 하나 있었다.
아울러 라파엘호 갑판의 일부분이 자리로 되어 있고, 일부분은 아무런 고정기구로 고정되지 않은 채
그저 잇대어 깔아 놓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으며, 갑판 위에는 배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3개 있고,
하늘이 흐리면 닻을 내리고 배에 짚으로 된 덮개를 덮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에 표착했던 주교님과 성인들
페레올(고 요셉) 주교, 다블뤼(안 안토니오)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석문(카를로), 최형(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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