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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혜석 기념홀(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층 전시홀)
    수원사랑/문화예술(文化藝術) 2018. 12. 2. 23:00

    나혜석 기념홀(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층 전시홀)


    수원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품인 나혜석의 작품 4점을 전시하고

     나혜석의 주요 연보와 어록을 만나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공간은 현대산업개발()의 기부로 조성된 공간으로 항상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8x75cm, 1928년경





    김우영초상

    캔버스에 유채, 79x70.7cm, 1928년경





    나부

    캔버스에 유채, 64x46cm, 1928년경





    학서암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72.7x60.6cm, 1938년경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羅蕙錫)


    나혜석은 국내 척 유성화가로 하국 근대사는 물론 문학, 역사, 여성학 등의 연구 분야에서 다각적인 평가를 받는 수원 태생의 예술가이다.

    조선사회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봉건적 인습에 저항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창한 여성해방론자였다.

    시대를 앞선 대담한 사회적 발언의 글쓰기로 주목 받았던 문필가였으며, 계몽적 의식을 지닌 민족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 경기도 수원생. 아버지(나기정)는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기의 관료.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입학 전에는 이름이 아지(兒只), 입학 후는 명순(明順), 졸업 때는 혜석(蕙錫).

    호는 정월(晶月). 진명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  


    1896. 4. 28.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나기정과 최씨의 5남매 중 넷째이자 차녀로 출생

    1906. 4. 수원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1910. 6.)

    1910. 9. 동생 지석과 함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서울)에 입학하여 최우등으로 졸업(1913. 9.)

    1913. 4. 사립여자미술학교(도쿄, 일본) 서양화학과 선과(選科) 보통과에 입학

    1914. 12. 도쿄 한국인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3호에 이상적 부인 발표.

    1915.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 1년 근무(아버지의 결혼 강요), 학비 마련하고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함

    아버지 사망. 애인 최승구가 결핵에 걸려 요양을 도움.

    1916. 오빠 경석의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

    1918. 3. 사립여자미술학교 졸업. 남성 위주의 가치관과 사회제도를 비판한 자전적 소설 경희를 여자계 2호에 발표.

    1919.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을 위해 박인덕, 신준려,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회합.

    자금 모금과 조직적인 인원동원을 위하여 개성, 평양 등지를 방문. 이화학당 만세사건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석방.

    1920. 4. 10.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김우영과 결혼.

    1921. 3.19~20.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서울에서 한국인 최초의 유화 개인전 개최.

    1922. 3. 만주 안등현 8번통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여자야학을 설립

    1922. 6.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 ‘농가로 입선. 이후 선전 및 제전에 연이어 출품하며 수상.

    1923. 3. 나혜석, 김우영 부부가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음.

    1927. 6.19. 부부동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다.

    1927. 8.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1888~1964)의 아카데미 랑송에서 수업.

    1928. 7. 영국 여성참정권운동에 관심을 가지다.

    1928. 9. 23. 미국 뉴욕에 도착하여 장덕수의 소개로 김마리아와 서재필을 만나다.

    1929. 2. 14.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길에 올라 321일 부산항에 도착.

    1929. 9. 23~24. 수원 남수리 불교포교당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 개최.

    1930. 11. 20. 김우영과 이혼

    1932. 여름. 금강산 해금강에서 머물며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화재로 인하여 10여점만이 남게됨.

    1932. 12. 삼화 이상을 지시하는 계명자계명에 그리다.

    1933. 1. ‘화가로서, 어머니로 나의 10년간 생활신동아에 발표.

    1933. 2. 4.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15호에 여자미술학사를 개설.

    1934. 8~9 김우영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과정과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하는 이혼 고백서삼천리에 발표.

    1935. 8. 24~25. 충남 예산읍 공회당에서 수덕사 근방의 정경을 그린 40여점 작품으로 전람회를 개최.

    1935. 10. 24. 서울 진고개(현 충무로) 조선관 전시장에서 소품 200점으로 개인전을 개최.

    1936. 1.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삼천리에 발표.

    1937. 12. 예산 수덕사(修德寺)에서 김일엽(1889~1971)을 만나다. 수덕여관에 머물며 주요 사찰을 순례하고 작품 활동.

    1938. 해인사를 떠나 수덕사 환희암(歡喜庵)에서 독서와 작품활동에 전념.

    1940. 김우영이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방해하자 실의에 빠짐.

    1943. 해인사로 다시 거처를 옮기다.

    1944.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서 잠시 기거.

    1947. 안양 경성보육원에서 기거. 화가 박인경을 만나 나혜석은 집필 중이던 자서전의 정서를 부탁.

    1948. 12. 10.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현 용산경찰서 자리)에서 53세로 타계.

     

    나혜석 주요 어록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 신생활에들면서,삼천리, 1935.2

     

    여자는 작다. 그러나 크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강하다.”

    - 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삼천리, 1935.6

     

    예술은 나의 일평생의 위안이요, 또 생활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취미요, 나의 직업입니다.”

    - 살림과 육아,매일신보, 193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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