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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야기념관(白冶紀念館) - 독립유공자 김좌진장군 기념관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8. 12. 13. 04:30

    백야기념관(白冶紀念館) - 독립유공자 김좌진장군 기념관



    독립유공자 김좌진 장군 기념관(백야기념관)





    백야기념관(白冶紀念館)




    김좌진 장군 흉상




    명문가(名文家)의 일원 김좌진(金佐鎭)의 가문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김좌진의 가문인 신 안동 김씨는 신라말 고창의 성주로 있다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어

    고려 태조로부터 안동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태사공(太師公)에 봉해진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조선 말기에 나라를 주도한 세도정치의 주요 가문이다.

    구한말 근대 인물 중 갑신정변의 3일 천하 주인공개화파 지도자 김옥균(金玉均)은 김좌진(金佐鎭)9촌간이다.


    김좌진 가계의 주요 인물

    김옥균(金玉均, 1851~1894) : 개화파의 선두주자로 갑신정변(1884)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3일만에 몰락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상하이에서 암살됐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 : 김형규의 차남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상징 인물로 청산리대첩을 지휘했다.

    26()’자 항렬로 김두한의 아버지

    김두한(金斗漢, 1918~1972) :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조선 제일의 협객이자 광복 후에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삿갓(1807~1863) :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24()’자 항렬, 유명한 방랑시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 : 조선 중기의 충신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 :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을 지냄(병자호란 때 주전파의 주요인물)

    김을동(金乙東, 1945~) : 김좌진의 손녀, 김두한의 딸로 배우 겸 국회의원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딸이 순조 비가 되어 정권을 잡은 세도정치의 상징적 인물, 22()’자 항렬  




    만주 청산리전투





    김좌진 친필 서한

    1901년 9월, 13살 김좌진이 스승에게 보낸 편지




    기호흥학회 규칙(畿湖興學會 規則)




    김좌진 군자금 모금 판결문(金佐鎭 軍資金 募金 判決文)

    대한광복회 판결문(大韓光復會 判決文)




    나라와 민족이 일제에 의해 피탈되자 항일운동에 나선 백야.

    항일독립운동 시작 백야 김좌진 장군(抗日獨立運動 始作 白冶 金佐鎭 將軍)


    경술국치에 분개해 홍성에서 서울에 올라와 독립군 자금 모금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26개월간 수감.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가입 항일투쟁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멸망되는 경술국치를 지켜본 김좌진(金佐鎭)은 분개하여 항일운동에 본격 나서게 된다.

    홍성에서 경성(서울)으로 올라와 본인의 인맥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1911년 독립군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투옥되어 26개월간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출감후에도 독립운동에 바로 나서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주로 군자금 마련이 주 임무였는데 결국 이로 인해 가장 요주의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만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만주로 망명직전 김좌진 장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 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심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님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만주로 망명 대종교 입교

    대한정의단 대종교인 백야(大韓正義團 大倧敎人 白冶)


    대종교 지도자 서일 총재와의 만남

    단군과 홍익인간 숭상 민족종교 대종교

    만주에서 민족종교와 항일투쟁을 연결

     

    만주 항일독립운동사의 인물들을 조금씩 살펴본다면 그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해 교단의 내분이 발생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 대종사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로 옮기게 된다.

    대종교는 19115월 백두산 기슭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고, 항일종교단체 중광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한인사회 규합과 항일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고 인물들을 모으게 된다.

    이에 만주에서 활동한 수많은 대종교인 무장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서일, 홍범도, 김좌진, 지정천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나철의 제자 서일을 총재로 하고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한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192010월 만주 청산리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에서 신화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앞서 6월 봉오동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둔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 원칙(大倧敎 原則)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음력으로 무오년 1918, 양력으로 191921일 선언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참여 백야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3.1운동 기폭제
    일본한테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라 일갈(一喝)
    만주로 망명하자마자 당당히 민족대표 반열에 오른 김좌진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성에서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독립을 요구한 선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하고 김좌진,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 39명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최초로 선포한 것으로

    이후 2.8독립선언과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학만(金學滿), 여준(呂準), 유동열(柳東說), 이광(李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

    이탁(李沰), 문창범,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翊), 손일민(孫一民),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방(林), 윤세복(尹世復), 조용은(趙鏞殷),

    조욱(曺煜), 재관(鄭在寬), 최병학(崔炳學), 한흥(韓興), 허혁(許爀), 황상규(黃尙奎) 등 39인이 서명하였다.




    대한독립군단 단원 체포 보고서(大韓獨立軍團 團員 逮捕 報告書)

    대한독립군단 재건 취지서(大韓獨立軍團 再建 趣旨書)




    광복군 병사들의 조국독립과 항일무장추쟁에 대한 맹세들이 써있는 태극기(1945년 중국 전선)




    김좌진장군 체포 인도 요구서(金佐鎭將軍 逮捕 引渡 要求書)

    신민부 예심 종결문(新民府 豫審 終結文)




    대종교 교리서(大倧敎 敎理書)

    대종교 교보(大倧敎 敎譜)




    김좌진장군 약력(金佐鎭將軍 略歷)




    홍주의병 창의기록 해암사록(洪州義兵 倡義記錄 海菴事錄)





    항일의병운동의 상징 홍주성 조양문(洪州城 朝陽門)


    홍주성(사적 제231)은 조선시대 읍성(邑城) 중 유적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 성곽 문화유산이다.

    길이 약 1,772m의 성벽 가운데 약 800m의 석축 성벽이 잘 남아 있고,

    현재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북문, 그리고 아문이 포함되어 있다.

    1451(문종 1)에 수축되었고,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은 특이하며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1870(고종 7)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관영을 지었는데,

    이 중 조양문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

    이 성에서 조선 말 많은 천주교도가 순교하였고,

    1895년 동학 농민운동 때 많은 동학교도들이 처형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항일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안병찬 등이

    1906520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퇴각시키고 홍성을 수복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항일의병의 몇 안되는 승리이다.

    당시 17세의 애국청년 김좌진도 자기 고향의 이 역사적 사건도 영광의 홍주성 조양문도 보았을 것이다.




    콜트 M1911A1 권총 - 광복군 제식권총 미제 45구경 콜트




    브로우닝 FN M1910 권총()

    남부식 권총()

     





    벨기에 FN M1900 권총()

    마우저 C96 권총()






    루이스 경기관총(Lewis Machine Gun) - 북로군정서 무장




    모신나강 소총




    38식 보병소총 - 청산리전투 일본군 무장





    코사크 검(Cossack Saber Chashka) - 김좌진장군 군도 추정





    백야 김좌진장군 사적비(白冶 金佐鎭將軍 事蹟碑)




    김좌진 장군(金佐鎭 將軍, 1889~1930)


    1889.11.24.()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상리 출생

    1904. 해주 오씨 오숙근과 결혼

    1905. 가노(家奴) 해방, 전답 무상공급

    1907. 호명학교 설립 신학문 권장

    1908. 기호흥학회 장학재단 설립, 한성신문 이사 취임

    1909. 이창양행, 서북학회, 오성소학교 설립

    1913. 일제에 피체, 3년간 투옥(서대문형무소 수감)

    1917. 대한광복단 조직, 단장 취임

    1918. 김헌, 김동삼, 유동열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문 선포, 정의단 군정회 참여 군사훈련 실시

    1919.12. 북로군정서 사령관, 사관연성소 소장 겸임

    1920.10.21.~26. 사단장, 포병부대 포함한 일본군 3,300여명 살상(청산리전투 승리)

    1921. 대한독립군단 결성(연합병력 3개 대대 3,500여명)

    1922. 대한독립군단 재결성 및 총사령관 취임

    1925.3.15. 신민부 창건(군사위원장, 사령관 겸임)

    1928. 한국유일독립당 조직

    1929. 한족총연합회 주석 취임

    1930.1.24.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 피살

    1930.1.29.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중국 흑룡강성 혜림시 산시진 신흥촌)

    1934.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이장

    1962.3.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단장지통(斷腸之痛)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돌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만주벌 호랑이 김좌진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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