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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병호 항일기념관(延秉昊 抗日記念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9. 1. 1. 05:02

    연병호 항일기념관(延秉昊 抗日記念館)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71




    곡산연씨(谷山延氏)의 도안(道安) 세거(世居)


    산연씨가 도안에 세거한 것은 16세기인 사직공 정(, 1486~1549) 때부터이다.

    그는 부친이 성종 21(1490) 죽은 후 모친 상산김씨의 친정인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내려와 살았다.

    그 후 안동김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도안으로 이주하였고, 손자대에 도안 일대에 7개의 분파를 이뤘다.

    이후 곡산연씨는 혼인과 분가, 이주 등을 통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청안(淸安)사마록(司馬錄)’19명의 곡산연씨가 등재된 것으로 미뤄보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가문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증평 일원에는 곡산연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연병호 출생과 성장


    연병호(延秉昊)18941122일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병학(秉學), 호는 원명(圓明)으로 독립운동 시기에는 병학, 병준(秉俊) 등 다양한 이명으로 불렸다.

    어려서 청안(淸安)의 사립 중명학교(重明學校)를 다녔고,

    19세인 1913년경 형 병환이 있는 중국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중등과정인 창동학원(昌東學院)에 입학하였다.

    형 병환은 그보다 16세 연상으로 그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이듬해 병에 걸려 귀국하여 1916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하였으나, 경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졸업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재학시절 교유한 안재홍(安在鴻)과 조용주(趙鏞周) 및 조소앙(趙素昻)

    그가 훗날 기독교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는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다.

     




    독립운동에 나서다


    연병호가 언제 중국으로 망명하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19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부터 이에 참여하였다.

    이해 일시 귀국한 그는 조용주, 안재홍 등 동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단체로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였다.

    그는 설립 수령으로서 이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외교원으로 피선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충주와 괴산, 대전에 지부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는 이해 8월 동지들과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건의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하였으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결성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해 11, 실체가 발각되어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시 북간도로 망명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원명 연병호 주요연보(圓明 延秉昊 主要年譜)




    무궁화 삼천리 조국 국권 광복


    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면하야 자생을 도하려 하나니,

    전하면 생하고 부전하면 사할지라 하물며 역천하는 적의 패멸에 조함은 명약관화하이리오

    유아배달족 신남신녀는 이천만의 철혈을 일합, 일거에 적을 파쇄하야

    무궁화삼천리조국의 국권을 광복하고 백두산상 태극기하에 명년 금일을 기념하기로 신전에 맹서합시다.


    연병호

    192031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 중에서




    용정 3.13 만세시위를 지원한 연병환(延秉煥,1878~1926)


    석곡리에서 태어나 1897년을 전후하여 관립 외국어학교를 다녔다.

    궁내부 주사를 거쳐 인천과 부산 등 주요 해관에서 근무하였고, 양지아문에도 근무하였다.

    1907년경 중국으로 이주, 안동을 거쳐 용정세관에 근무하였는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북간도 한인사회의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특히 그는 남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았고, 고향에도 토지가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는데,

    이를 배경으로 1919313일의 용정 만세시위를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 피체되어 고초를 당하였고, 결국 상해세관으로 전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계속 감시하여 결국 복주 삼도오로 쫓아냈다.

    상하이 송경령능원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는 2014년 국내로 송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영면하였다.

    연병환은 동생 병호를 비롯하여 일가의 독립운동을 이끈 기둥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장부의 파수꾼 엄항섭(嚴恒燮, 18981962)


    1898년 경기도 여주에서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파(一派), 필명으로 대형(大衡)을 사용하였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항저우에 있는 지강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하고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하여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일제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서 대한민국임시약헌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김구가 작성한 선언문 등 각종 글을 번역하거나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으며, 최측근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1935년 한국국민당, 1939년 한국독립당(중경)이 창당될 때 주역으로서 독립운동 정당활동을 주도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한 이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아 김구와 함께 환국하였다.

    환국 후에도 단 한시도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하였다. 19509월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힘쓴 것으로 전해지지만, 1962년 숨져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킨 연미당(延薇堂, 1908~1981)


    1908년 북간도 용정에서 연병환과 김해김씨(金貞淑)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충효(忠孝)이다.

    1927(19), 이동녕의 중매로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1930년 상해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여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상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한 상해각단체연합회결성을 주도하였다.

    1932년 가흥으로 이동한 부부는 임시정부 요인을 정성껏 보살폈고,

    1936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6년 김구가 장사에서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당하자 집으로 모셔 극진히 간호하였다.

    1938년에는 남편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선전공작활동을 펼쳤고, 이후 광복군과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하였다.

    중경으로 이동한 뒤에는 재건한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하였고, 자유한인대회를 주도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광복을 맞이하여 환국하였다.

    그러나 6.25 때 남편이 납북당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부모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엄기선(嚴基善, 19292002)


    1929년 상하이에서 엄항섭과 연미당의 큰 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1938년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戰地工作隊)에 참여하였다.

    청년공작대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의 아들 노태준을 단장으로 193810월 조직된 공작대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선전물 배포, 횃불시위, 가두행진, 연극공연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3934일에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한 중국군을 위문하는 공연을 열었는데,

    어린이들의 무용과 합창으로 청중의 갈채를 받으며 한.중 공동투쟁의 우의를 다졌다.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인 아버지를 도와

    중국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또한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한국인 포로를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이는 활동을 펼치다가 해방되어 환국하였다.

    환국 후 3.1여성동지회 대전지회장을 역임하였고 사회복지 활동에 종사하였다.

     




    연병호(延秉昊, 1894~1963)


    연병호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연계시켜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분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혁명당을 조직했고, 이후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만드는데 헌신하신 분이다.

    그러나 친일파의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처단 활동으로 인해서 체포되고 징역 8년 형을 받아 끔찍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독립운동에 힘쓰셨던 연병호 선생은 18941122일에

    충북 괴산 도안면 석곡리에서 태어났고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형 연병환의 영향을 받았다.

    1915년에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니면서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서 활동하면서

    안재홍, 조용주 등과 민족현실을 논의하고 앞날을 도모하는 동지적 유대관계를 이어나갔다.

    본격적으로 연병호 선생이 독립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서

    1919년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하게 된다.

    또한 외교시보를 발행하여 국내의 여러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2세대 독립운동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누구보다도 투철한 독립정신과 강인한 실천을 항상 주장해왔다.

    1920년 독립신문에 독립기념의 말이라는 기고문에는 선생의 실천의지가 잘 담겨 있다.

    이와 더불어 선생이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강조했던 것은 바로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이었다.

    이를 위해 연병호 선생은 상해에서 세계한인동맹회, 유호 청년회, 시사책진회 등의 조직들과 함께하며

    독립운동계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1923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중국의 항일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한중연합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무장투쟁 노선에서 대일항전 방략을 추진해 나갔다.

    1925년 말에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참가하여 독립군 양성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9년에는 선생은 남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이후 1932년에는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단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한 결과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합당해서 신한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에도 대정조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5개 정당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에 열정을 기울였다.

    1933년 충청도의원 자격으로서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던 선생은

    1937년 초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 저격사건으로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선생은 이 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연병호 선생의 삶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평생을 독립운동 세력의 조직과 통합에 헌신한 삶이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에 자신보다는 나라사랑을 위한 일을 선택했다.





    고 연병호 선열 건국공로훈장증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연병호 항일기념관(延秉昊 抗日記念館)


    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하야

    자생(自生)을 도()하려 하나니,

    ()하면 생()하고,

    부전(不戰)하면 사()할지라.

    일거(一擧)에 적을 파쇄(破碎)하야

    무궁화 삼천리 조국의 국권을 광복하고

    백두산 상 태극기 하에

    명년 금일을 기념하기로

    신전(神前)에 맹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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