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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산허위선생기념관(旺山許蔿先生記念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8. 12. 4. 04:30

    왕산허위선생기념관(旺山許蔿先生記念館)





    13도창의군 의병대장(十三道倡義軍 義兵大將) 왕산허위선생상(旺山許蔿先生像)





    왕산 허위선생(旺山 許蔿先生)


    구한국 때의 의병장(義兵長). 경북 선산(善山) 출생. 호 왕산(旺山).

    유가명문(儒家名門)에서 태어나 7세 때 시를 지을 줄 알고 16세 때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 <손자병법(孫子兵法)> 등도 탐독했다.

    1897년 일본군과 항쟁하기 위해 동지 이은찬(李殷燦)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金山)과 성주(星州) 사이에서 싸우다가, 고종 황제가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명령을 받아 부대를 해산하고 귀향했다.

    이듬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참봉(參奉)성균관 박사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등을 지내고,

    1904년에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이 되었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는 격문을 살포하고 체포되었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품(敍品)되었으나, 받지 않고 낙향하였다.

    이해에 고종으로부터 義擧라는 두 글자를 쓴 의대밀조(衣襨密詔)를 박도 의병을 모집하여 경기지방에서 거병(擧兵)했다.

    1907년에는 이인영(李麟永) 등과 원주(原州)에서 전국 의병 대연합부대를 조직, 춘천(春川)을 거쳐 양주(楊州)에 이동하고,

    서울에 있는 각 외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어 한국 정식군대오서의 발족을 선언했다.

    이때 그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서울을 함락하고, 일본 통감부(統監府)를 격파하기로 결의한 후

    먼저 정병 3백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후진(後陣)이 일본군에게 진로를 차단당해 그의 부대는 고군혈투(孤軍血鬪) 끝에 패하였다.

    마침내 적에게 포로가 되어 재판정에 섰으나,

    오직 일제의 통감 이토오(伊藤博文)을 힐난하면서 재판을 거부, 서대문 옥에서 순국하였다.












    왕산(旺山) 허위(許蔿)선생 유허비

     

    배달의 푸른 얼이 삼천리를 굽이쳐

    화랑의 가슴에 뛰고

    선비의 핏줄에 여울져

    이제도 여기 맥맥히 흐르고 있다.

    근세 조선 말기

    왜적이 이 땅을 짓밟아 올 때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

    겨레의 넋을 밝히고

    뜨거운 피를 바쳐

    반만년의 기상을 살리신 분을

    여기 새기니

    이 고을이 낳은

    의병장 허위(許蔿) 선생이시다.


    세기를 앞지르는 밝은 눈으로 백성을 걱정하고

    삼천리를 휘덮는 매운 뜻으로 원수와 싸웠다.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니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 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청사에 빛나는 서울진공작전(進攻作戰)’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高宗)이 양위(讓位)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다시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포천(抱川), 양주(楊州), 철원(鐵原), 연천(漣川)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고,일본군과 싸워 이겨 경기의병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전국에서 모인 의병 1만 여명이 13도창의군(연합의병부대)을 결성하고 선생이 군사장(軍師將)으로 추대되어,

    일제의 통감부를 치기 위해 각 의병대가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 집결키로 하였다.

    선생은 30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선발대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후원군의 도착이 지연되고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퇴하였다.

    일제의 통감부를 무찌르고 서울을 탈환하고자 한 서울진공작전은 항일의병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서울 공략에 실패한 의병들이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고 선생은 다시 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왕산 허위선생(旺山 許蔿先生)과 을미의병(乙未義兵)


    1895년 일제(日帝)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사건이 일어나자,

    18963월 김산(金山, 현 김천)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무기고를 탈취하고 성주(星州)에서 관군(官軍)과 접전 끝에 패퇴하였다.

    피신 후 다시 흩어진 의병을 모아 충청도 진천(鎭川)에 이르러 고종(高宗) 임금의 명에 의하여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맏형인 방산(舫山) 선생이 은거한 청송(靑松)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父葬未成(부장미성)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

    國權未復(국권미복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不忠不孝(불충불효) 충성도 못했고 효도도 다하지 못했으니

    死何暝目(사하명목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 왕산 허위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말씀 -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자가 많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 안중근 의사 -







    왕산로(旺山路)

    왕산이 이끈 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리기 위해 동대문에서 청량리 도로를 왕산로로 제정하였다.







    왕산 허위 선생(旺山 許蔿 先生, 1855~1908)


    왕산 허위선생은 18554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작은 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맏형인 방산공(舫山公) 허훈에게 글을 배웠다.

    방산공은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쳤던 분이다. 19세 연하의 동생에게 글을 가르치며 방산공은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 한다라고 하여

    왕산 허위선생이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또한 후에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 1879~1910)가 거사 후 법정에서 왕산 허위선생을 평하기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허위선생의 인품이 어떠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9510월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에 항거 1896년 을미의병 때 김산(김천)에서 기치를 들었다.

    김산의병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였으나 고종의 밀서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청송 진보에 있는 맏형(방산공)에게로 가서 학문에 진력했다.

    선생은 1899년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성균관박사, 평리원 수반판사와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 등 관직에 봉직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1904년 평리원 수반판사로 재직 시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하는 등 한국침략에 박차를 가하자,

    선생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배일통문을 돌리는 등 항일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하고 협박하여 선생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귀향토록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어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대한제국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완전히 기울게 되자 1907년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해 11월에는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의병의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다.

    그런 후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1만 여명의 의병을 양주로 집결시켰다.

    서울진공의 선공을 맡았던 선생은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삼백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1908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서울에서는 사전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리고 본대가 때맞춰 도착하지 않아서 패퇴하고 말았다.

    비록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전국의 의병부대가 모여서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그리고 조국의 국권회복이라는 비전을 품고 강한 리더십과 결단력으로 행동에 옮긴

    왕산 허위선생의 그 기상은 우리의 표상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후 선생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에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089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이러한 왕산선생은 공훈을 기려 정부에서는 1962년 독립운동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서울시에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km 구간을 왕산로(旺山路)로 제정하였고,

    20039월의 호국인물, 2004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2009928일 왕산 허위선생기념관(지하 1, 지상 2, 1,950)이 개관되었고,

    기념관에서 바라보이는 생가 터에 기념공원(1,990)이 조성되어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그 뜨거운 민족애,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고 느껴보는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

    경상북도 구미시 왕산로 28-33 (임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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