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초의선사기념관(艸衣禪師紀念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9. 6. 22. 04:30

    초의선사기념관(艸衣禪師紀念館)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기념관이다.

    생애는 현관 입구에 마련된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전시된 유물과 패널로 상세히 소개한다.

    선사가 일생에 머물렀던 일지암(一枝庵) 모형과 사진도 있다.

    첫 진열장에는 저서인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과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 초의집(艸衣集) .하권,

    영정(影幀)과 그림, 사십이수관음상(四十二手觀音像)과 준제보살도(準提菩薩圖)가 전시되어 있다.

    선사의 대표적인 시문학 사상과 선 사상(禪 思想), 오도송(悟道頌)을 보여 준다.

    평생 지음(知音, )이 되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완당전집(阮堂全集)과 유묵(遺墨) 탁본집이 있다.

    두 번째 진열장에는 선서의 선 사상을 대변하는 초의선과(草衣禪課), 백파선사(白坡禪師)

    선 논쟁을 불러왔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필첩(筆帖), 염불 수업 교재 등이 전시되고 있다.

    범어(梵語) 친필과 손수 그림 십팔나한도(十八羅漢圖) 두 점도 선보인다.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으며, 차 도구와 동다송, 다신전(茶神傳) 등 차 관련 서적이 진열돼 있다.

    초의선사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을 방문하여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와 함께 지은 시()도 전시돼 있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 30 (왕산리)






    초의선사(艸衣禪師)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 때인 17864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장씨지만 속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했다고 전한다.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가문이 미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순(意恂)은 법명이고 초의(艸衣)는 출가 후 스승 완호 윤우(玩虎 倫佑) 대사로부터 받은 호이다.

    별칭인 일지암(一枝庵)은 수행하던 암자 이름이다.

    해옹(海翁)해사(海師)해노사(海老師)해양후학(海陽後學)해상야질인(海上也耋人) 등은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지어주거나 스스로 정한 호이다.

    김정희와는 동갑내기이다.

    5세 때 바닷가에서 놀다 깊은 곳에 빠졌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주었다고 한다.

    그 스님의 권유로 15세에 나주시 다도면에 있는 운흥사(運興寺)로 가서 벽봉민성(碧峰敏性)을 은사로 출가했다.

    19세 때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가는 도중 월출산(月出山)에 올라 기이한 산세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가

    문득 중천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홀연히 깨쳐 이후로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해남 대흥사에서 완호 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초의선사(艸衣禪師)의 일대기(一代記)


    초의스님은 178645() 전남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全南 務安郡 三鄕面 石峴里)에서

               인동 장삼천(仁同 張三阡)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출가, 운흥사(雲興寺 나주군 다도면 덕용산) 벽봉선사(碧峰禪師)로부터 수계(受戒)하였고,

    19세 때 영암 월출산(月出山)에서 상봉에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크게 느꼈다고 한다.

    22세 때 쌍봉사(梔峰寺)에서 토굴생활,

    24세 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과 백련사(白蓮寺)에서 초대면했고

    30세 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과 서울에서 초대면,

               이 세분이 이후 오고 간 시서화차(詩書畵茶)에 얽힌 인연은 선비 세계의 격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32세 때 불국사(佛國寺)에서 득도(得道). 41세때 일지암(一枝庵) 결암.

    45때 다신전(茶神傳) 정서(正書).

    48세 때 추사선생 아버지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 선생 일지암 심방.

    50세 때 소치 허유(小痴 許維룡선생이 찾아와 사사(師事 당시 27). 일지암에서 수업했다.

               초의스님과 소치 선생의 이 인연 다음에 추사선생에게 이어져 화가로서 대성

               운림산방(雲林山房) 4대에 걸친 도도한 화맥의 원천 구실을 했다.

    52세 때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성서격인 동다송(東茶頌) 저술.

    55세 때 추사선생이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자 그곳까지 세 차례나 찾아갔다.

    56세 때 추사의 유배지에서 쓴 글씨 일로향실(一爐香室)을 소치편에 보내왔는데

               이 글씨는 현재 해남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각()이 되어 걸려있다.

    58세 때 고향인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에 들렀고 이 감회를 시(歸故鄕)로 읊었다.

    71세 때 천상천하 둘도 없는 벗 추사 별세. 나이도 같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눈물겹도록 뜨거웠다.

    81세 때 82() 일지암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초의선사의 저서


    일지암시고(一支庵詩稿)

    스님이 일생동안 선의 여가에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모두 4권으로 401수의 시가 실려있으며 한 책으로 묶여져 있다.


    일지암문집(一支庵文集)

    스님이 일생동안 지은 소(), (), (),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영찬(影贊)

     52개 항목과 부록으로 탑비명이 수록되어 있다.


    초의선과(草衣禪課)

    ()의 요지를 밝힌 선문염송(禪門拈頌)중에서 그 골자만을 가려내 주석을 달고, 자신의 선론(禪論)을 붙여 만든 책이다.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의 잘못된 점을 논박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으로 백파선사의 3종선 주장을 2종선으로 논박하였다.

     

    동다송(東茶頌)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전문서이다.

    스님이 나이 52(1837) 되던 해 봄에 다도를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에게 저술해서 보낸 것이다.


    다신전(茶神傳)

    차생활에 필요한 차의 지침서로서 스님이 45(1830) 때에 일지암에서 정서해서 펴낸 것이다.

    다신전은 스님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고, 중국의 만보전서라는 백과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다경채요의 원문을 추출해 내서 제명을 하고 발문을 달아 만든 책이다.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

    평소에 지은 서(), (), 제문(祭文) 11편을 수록한 친필수고 초본이다.

    이 글 가운데 해거도인에게 동다송을 저술해서 보낼 때 함께 보낸 서간문이 들어있다.


    초의시고(草衣詩稿)

    스님의 법손(法孫) 상운응혜(祥雲應惠)와 법제(法弟) 쌍수일한(雙修一閒)이 인간(印刊)한 활자본 상하 두 책이다.

    일지암시고와 일지암문집을 합쳐서 편집 간행한 것으로 스님이 열반한 후에 간행되었다.

     



    초의선사 작품 예술세계


    초의선사는 다방면에 걸쳐 예능(藝能)을 떨쳐 보였던 예술인(藝術人)이었다.


    ()

    초의선사의 시학(詩學)은 당대의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던 정도로 빼어났다.

    여러 문사(文士)들과 어울려 수시로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이름난 문장가들이 앞다투어 스님과 시로 교유하기를 원했다.

    홍석주(洪奭周)"호남의 스님 초의는 학자, 선비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시문은 속성(俗性)을 벗었다.

    또 정결·간명하여 마치 당·송 시대의 그것과 같이 군더더기 없이 맑다라고 했다.

    신위(申緯)시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 가운데서도 시인은 많았으나

    도중에 끊기고 말더니 이제 의순의 시를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초의선사의 시 세계가 지니고 있는 탁월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평가이다.


    ()

    초의선사의 제자 범해각안(梵海覺岸)이 지은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초의의 범서(梵書)가 당시 모든 서예가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스님의 범자 서예가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스님의 필적을 접한 서예가들은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스님의 친필은 대부분 행방이 묘연해 서체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

    초의선사는 시(), ()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능했다.

    특히 불화(佛畵) 솜씨는 근대 불화 작가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정도이다.

    대흥사에 있는 천수관음보살도와 준제관음보살도는 스님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대광명전에 그린 단청 역시 걸작으로 평가된다.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허련이 처음 스님의 문하(門下)에서 시와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로도 스님의 화재(畵才)는 충분히 짐작된다.

    불화 이외의 작품으로는 백운동도(白雲洞圖)’, ‘다산초당도(茶山艸堂圖)’,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진본의 열람은 쉽지않다.

    스님의 회화사적 위치와 화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급한 실정이다.




    초의집(艸衣集)


    1906년 초의선사의 법손인 상운 옹혜와 법제인 쌍수 일한이 펴낸 목활자본으로 상하 전 22책이며, 하권 후반부에 문이 실려 있다.

    시편은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의 내용과 동일하며, 문편은 일지암문집(一枝庵文)’보다 내용이 훨씬 적게 실려 있다.




    초의선사의 친필


    선의 여가에 익힌 글씨는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고,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추사 김정희와는 평생에 지음(知音)이 되었으나 추사 서법에 영향을 받지않고 별개의 글씨를 썼다.




    승보계안(僧寶禊案)


    대흥사 역대 스님들의 계보를 기록한 책으로 중간에 증보한 것이다.

    초의선사 때 다시 증보하고 초의선사가 서문을 짓고 썼다.

    이 승보안이 대흥사가 배출한 승려들의 법계와 계보를 자세히 알 수 있을 뿐만아니라

    표충사의 유사(有司)를 맡은 소임까지 알 수가 있다.




    동다송(東茶頌)


    한국의 다경으로 불리울 만큼 높은 자료적 가치를 지닌 저술이다.

    1837년 다도를 묻는 홍현주에게 저술해서 보낸 것으로 모두 31송으로 되어 있으며, 각 송마다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스님의 선다일여(禪茶一如)’ 사상이 잘 드러났다는 평가이며, 초의스님의 친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동다송(東茶頌)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차 전문서이다.

    초의선사가 52세 되던 해 봄(1837)에 다도(茶道)를 알고자 하는 해거도인 홍현주의 부탁으로 저술해 보냈다.

    처음에는 동다행(東茶行)’이라고 하다가 동다송으로 불렸다. 모두 31송으로 송구(頌句)마다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옛 고전인 다경과 선이기, 만보전서, 다시 등 21개 문헌을 34회에 걸쳐 인용하여

    초의선사의 다론이 옛 사람이 전하는 뜻(고인소전지의, 古人所傳之意)과 어긋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다.


    동다송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셔라

    둘째, 우리나라 차는 중국 차에 비해 약효나 맛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셋째, 차에는 현묘하고 지극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 한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신(), (), (), ()의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해 설명하고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