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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산 안창호기념관(島山 安昌浩記念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9. 7. 11. 04:30

    도산 안창호기념관(島山 安昌浩記念館)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健全)한 인격(人格)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人物)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自身)이 왜 인물이 될 공부(工夫)를 아니 하는가  























    도산의 출생과 성장


    산 안창호는 187811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도롱섬에서 농부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8살까지 집에서 글을 배웠고 집안일을 도우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4살부터 16세까지 김현진(金鉉鎭)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한 도산은 같은 서당을 다니던 필대은(畢大殷)과 교류하며 신사상을 키워 나갔다.

    도산이 16세 되던 해인 1894년은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청일전쟁 등으로 혼란할 무렵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도산은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피난하고 명승고적들과 가옥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때 도산은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도산은 1895년 밀러학당(후에 구세학당으로 부름) 보통부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고 3년 간 공부한 뒤 졸업하였는데, 졸업 후에는 그 학교 조교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한 도산은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의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바로 보고 철저한 자기비판 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도 실력양성, ''을 길러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한 도산은 필대은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3년 간 경기·황해·평안 각도를 순회하며 연설하였다.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청년 도산은 근대화론과 민주주의사상을 접하고, 그 영향 아래 자신의 정치 및 사회사상을 키워 나갔다.

    1898725(음력) 광무황제의 생신을 맞아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도산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이 연설에서 도산은 정부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민중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도산은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22세에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강서군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도산은 황무지 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3년 간 점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시행한 뒤, 본격적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도산은 더 큰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구세학당 밀러목사의 주선으로 교육학을 공부하고자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902년 약혼녀인 이치관의 딸 이혜련(李惠練)과 결혼한 도산은 결혼 다음날인 114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격한 도산은

    이때 자신의 호를 직접 도산(島山)'이라 명명하였다.  




    1차 도미


    1902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노동일을 하면서 소학교를 다니던 도산은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약 2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한인들은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미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도 서로 분쟁을 일삼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산은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개선 지도가 더 시급함을 깨달았고,

    뜻을 같이하는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과 함께 1903<한인친목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한인친목회는 주로 동포들의 생활 개선과 직업을 알선해 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도산은 9월 로스앤젤레스 근교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고 성경과 영어를 공부하였다.

    도산은 한인친목회를 확대·발전시켜 190545일에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각지에 활발히 지회를 설립하였다.

    공립협회는 발전하여 6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11월에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에 회관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1120일부터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이즈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11월 광무황제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이른바을사5조약'을 늑결하였다.

    그러자 공립협회는 1906년 하와이 에와친목회와 공동으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을사5조약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재미한인에 대한 일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동포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산은 조국의 현실을 좌시한 채 미주에 안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도산과 공립협회원들은 국내의 민족운동계와 각 지역에서 형성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해외 모든 지역에 독립운동을 통괄, 담당할 연합기관을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연합한 후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였다.

    도산은 동지들과 의논하여 국내지사들과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고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해 나갈 조직을 구축하고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도산은 1907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이강, 임준기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고

    국내외 모든 한국인은 통일, 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한 후 대한신민회 통용장정과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대한신민회는 국내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후 도산은 19072월 일본을 거쳐 국내로 귀국하여 윤치호, 이갑, 양기탁 등과 접촉하며 조직 구축에 노력한 결과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신민회 조직과 활동


    일본을 거쳐 1907220일 귀국한 도산은 발빠르게 애국지사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4월경 상동청년학우회, 대한매일신보, 구한말 군인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지사들과 결의하여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봉건적 구사회사상과 관습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

    국권을 회복하여 근대적 자유문명국가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도산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교육, 언론, 실업, 학회 등 각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근대교육과 애국교육을 실행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직접 강의하였다.

    한편 19098월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였다.

    도산은 청년학우회를 통해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제, 용감을 기본 정신으로 하여

    한 가지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하고, 매일 덕··지육의 수양을 한 가지씩 행하여 수련함으로써

    민족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울, 평양,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여 서적 판매와 함께 출판사업을 계획하였다.

    태극서관은 신교육 보급만이 아니라 신민회 회원들의 비밀연락처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瓷器會社)를 설립, 민족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도산은 이후에도 자본력이 부족하여 산업 투자가 어려운 민족현실에서

    한인들의 소자본을 주식형태로 모아 투자하는 많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여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주권 침탈행위가 심각해지자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일제 침략을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배출하여 기회가 올 때에 독립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우고,

    국내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가장 적합한 곳으로 선정하였다.

    구국을 위한 도산의 여러 활동이 알려지면서 도산은 당시 민중들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병합계획을 착착 세워가면서 도산에게 은밀히 청년내각'조각을 제의하였으나

    도산은 이를 결연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대성학교 학생들은 융희황제가 서도지방을 순행할 당시 이토 통감을 위해 일장기를 들고 나오라는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산은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도산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주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한인단체들과 통합하여 <국민회>로 재편되었고,

    신민회와 연계 하에 비밀리에 국외 기지개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각지에 파견되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한 기지개척운동은

    우리 동포가 다수 거주하고 있는 노령(연해주)과 북간도지역 외에 서간도와 북만주(蜂蜜山), 중국(북경), 몽고지역까지도 물색되었다.

    도산은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를 총본부로 하여 해외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여 상호간의 연락을 취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 나라의 운동세력과 결속관계를 맺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도록 하며,

    산업·교육방면에서 부단히 실력을 키워 일본과 일전을 벌릴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2차 도미


    19115월 시베리아에서 미주를 향해 출발한 도산은 페테르스부르크, 독일,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그 해 92일 미국 뉴욕항에 도착하였다.

    도산이 없는 동안 <국민회>19105월에 하와이 한인단체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도산은 19122월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여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을 증진시킬 중추기관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하였다.

    중앙총회장에 선출된 도산은 북미는 물론 하와이, 멕시코, 쿠바, 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지방총회를 지휘하며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간행하여 일제에 의해 억압된 민족언론을 되살리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미국무성과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유학생과 망명 애국지사들은 여행권을 갖지 않고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입국이 가능하였고 영주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1915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학생양성소)를 발전시켜, 한인 2세에게 잊혀져 가는 모국어를 교육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19171월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우선 농업경영에 착수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국제무역에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1927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19176월부터 12월까지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이승만과 박용만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하고 교민사회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는 뉴욕에서 개최되는 <소약소국동맹회>에 박용만을 대표로 참석케 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1918년에는 멕시코 한인들의 초청을 받아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급한 임금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멕시코 한인동포사회를 통합시키고,

    학교 및 실업회사 설립 등을 독려한 뒤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임시정부 활동


    19193·1운동은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쳤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도산은 315일에 대한인국민회 전체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중앙총회장의 명의로 결의안과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도산은 미주지역을 대표하여 동포들이 모금한 독립자금을 가지고 5월에 25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도산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서리로 업무를 시작한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고 헌법과 법률을 제정·검토하였다.

    또 임시정부 내에 연통부(聯通部)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여 비밀연락망을 구축, 국내 및 한인사회와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또한 임정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고 <대한민국적십자회> 결성하였으며,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다방면에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상해와 국내 한성임시정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정부로 대표되는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도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권회복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과제를 실현시켜줄

    실질적인 국민의 총집결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기로 하고,

    191996일 통합헌법을 성립시켜 911일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도산은 통합임시정부의 노동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임시정부 관할 아래로 끌어들이고자 각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교섭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빈약한 재정상태로는 효과적인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재정 상태가 심각해지자 도산은 정부기관 축소와 직제 개편, 역할분담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즉 상해는 기록 보존 사업과 연락 담당을, 노령에는 군사기관을 설치하고,

    미주는 독립자금 부담과 구미와 중국을 향한 외교활동 전개 등의 역할을 분담하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부가 재정확보를 위해 직접 개척사업과 영업을 함으로써 정부를 유지한다는 방략을 세웠다.

    그리고 사업진행을 위해 해외동포의 민적(民籍)을 작성하여 납세와 병력,

    법률복종의 의무를 지는 국민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편 러시아·중국·한국 3국간에 동맹을 맺고 일본 안에 내란을 조성하여 미·일간에 전쟁을 촉발시킨다는 방략을 세웠다.

    그리고 노령에 있는 한인공산당과도 연합하여 북경·상해 등지에서 정부를 파괴하려 하는 반임정 세력을 봉쇄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한 다수 청년들을 독립군 지원병으로 수용·훈련하여 청년층의 불평 행동을 제거한다는 효과를 아울러 기대하였다.

    이처럼 도산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총단결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략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미주와 만주 및 중국, 노령을 잇는 광대한 지역에서

    통일성 있게 독립투쟁을 지휘하고 전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1920년 이후 독립운동세력의 사상분화와 노선갈등이 복잡해지면서 이들간에 통합은 더욱 어려워졌다.

    192013일 도산은 임정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에 대한 연설로써 독립운동의 확실한 방침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도산은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수행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재정 확보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정부가 정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국민의 세금이 정부 재정의 기반이 되어야 하고,

    납세를 위해서 국민은 일정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을 가져야 하며,

    한인들은 모두 군적(軍籍)에 등록하여 유사시에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른바국민개납',‘국민개업',‘국민개병'을 독립운동의 지도 방침으로 세웠던 것이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부로 올려놓고자 각 방면으로 전력하였으나, 임시정부는 곧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는 임시정부를 혼돈으로 몰아갔다.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취임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박용만의 외교총장 취임거부, 북경에서의 반임정운동 등으로 진전되면서 임시정부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도산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과

    개인의 비난이 정부의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도산은 19215월에 노동총판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도산은 거의 침식을 잊고 각방면으로 권유하며 원근 각지로 연락에 취하였다.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국민적 공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교서하던 도산의 노력이 드디어 그 결실을 맺어

    19231월 초부터 5월까지 61개 단체 1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미주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도산은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만주대표로 참가한 김동삼이 새로이 의장에 선출되고, 도산은 윤해와 함께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도산은 임시정부를 그대로고수'하자는 의견을 내세워

    장차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계속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계속한다면 현 임시정부는 이를 존속하되,

    다만 각 원의 개조로 끝내고, 각 파와 단체를 통일하자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51563회 회의를 끝으로 독립운동계의 노선 차이만을 드러낸 채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분산되어 갔으나

    도산은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하여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하는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의 유일당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 관내 주요지역과 만주지역까지 확산되었다.  




    3차 도미


    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원동지역에서도 흥사단운동이 필요함을 느꼈다.

    사단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지혜·도덕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그런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심신 훈련이다.

    단원들은 덕목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사업과 사회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도산은 수차례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하는 가운데, 유망한 청년들에게 흥사단의 이념을 선전하고 단원 가입을 권유하였다.

    도산의 방대한 독립운동의 계획과 그 이상에 감화를 받은 이들은 입단식을 거쳐 단원이 되었다.

    그리고 1920920일에 국내를 비롯한 중국·연해주·국내·일본을 관할 운동권으로 한 지부조직으로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로 정식 결성되었다.

    19201229일에 흥사단 제7회 대회를 처음으로 원동에서 개최하였고,

    1921126일에 개최된 반장회에서는 임시원동위원회 규정안과 임시원동편집국 규정안을 통과시키고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민족의 장래를 인재양성에 두었던 도산은 그와 함께 초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던 열혈청년들과

    중국에서 공부하는 학생 등, 주로 청년층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도산은 원동위원부 강론회를 수시로 개최하여 여러 가지 주제의 강연과 자유로운 토론을 진행하며 서로의 방략과 의론을 합치시켜 나갔다.

    ·우익간에 사상 논쟁과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을 때도 위원부에서는

    단원간에 어떠한 사상논의나 주제든지 자유롭게 토론하며 공론을 세워 나갔다.

    상해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좌·우익의 싸움에서 원동위원부는 중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각 운동 노선을 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는 이상촌건설운동과 재정확보운동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면서 독립운동을 현실화하는 기초작업에 진력하였다.

    국가 건설에 기여할 인재들이 전문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어학 등의 보습교육을 행하면서

    흥사단의 주의와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1924년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도산은 모범촌을 건설하기 위해 양자강 연안의 진강(鎭江)

    길림(吉林산해관(山海關금주(錦洲호도도(葫蘆島) 지역을 답사하였다.

    또한 동경성과 경박호 연안을 왕래하며 그 지역의 땅의 상태(地味)와 풍토, 그리고 음료수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조사하였다.

    이 외에도 기지 개척지로서 광동 지방과 필리핀·보르네오·싱가포르, 그리고 내몽고 지역까지 주목하였다.

    이상촌 건설의 노력은 도산이 피체되기 1년 전까지 지속되어 도산은 김규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보루네오섬에도 한인들을 이민시켜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계획하였다고 한다.

    도산은 그간의 독립운동의 다양한 노선을 수용하고 실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전환의 모색이 될 유일당 조직운동과 모범촌 건설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 줄 힘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9247월 도산은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도산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미주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지도하였다.

    동시에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의 주의정신을 일치시키고 원동에서 진행기키고 있는 사업내용을 설득하였다.

    1221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환영회에서 도산은 3·1운동 이후의 여러 독립운동들은 국부적 활동에 불과했음을 반성하고,

    그간 우리 가운데서 준비독립운동자를 무시하는 이도 없지 않으나 우리는 실제적 준비를 하여

    장래에는 유계획·유조직한 독립운동을 하여야 되겠습니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동족간의 분쟁을 하지말고 단합과 통일로 동족을 사랑하고 전문지식을 갖고

    계획을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실행할 것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납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 중국 동부지역에 모범촌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실업기관 조직에 전력해야 할 것이며,

    모든 한인들은 일본과의 관계 단절(납세 거부·상거래 거부·명령불복·일본 정치가들의 소멸 등)

    일제 시설(철도·교량·선창·무기창고·관청·병영 등)의 파괴 공작 등을 독립되는 날까지 수행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대독립당 운동


    가족과 재회한 행복한 순간도 잠깐 도산은 오스트레일리아를 경유하여 110개월만인 1926522일경에 상해로 돌아왔다.

    미주 한인들의 지지를 받아 자금을 모금하고 희망과 기대를 품고 상해로 귀환하였지만, 외적 조건은 악화되어 갔다.

    먼저 무력 독립군의 기반이 되고,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이 되어 줄 만주지역 한인들이 생존조차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진 것이다.

    1925611일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국 봉천성 간에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중국 관헌은 재만 한인의 무기휴대 및 한국 침입 금지, 불령선인 단체의 무장 해체, 재만 한인이 소유한 총기, 화약의 몰수,

    불령선인 단체의 수령을 체포, 일본 관헌에 인도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마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치였다.

    여기에 1926년 만주지역에는 전에 없는 흉년이 닥쳐 농업에만 의존했던 동포들의 생활상은 비참하였으며,

    중국 도처에서 일어난 한인추방과 지방관청의 가혹한 세정으로 한인들은 생활의 근거조차도 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진전이 있어 도산이 미주에 있는 동안 상해 중심의 임시정부· 한국노병회·흥사단원동위원부·의열단 등

    청년들이 192445<상해청년동맹>을 창립하여 유일당 운동의 후원을 선언하였다.

    리고 임시정부도 192547일에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만주의 지도부를 임시정부 내각진으로 끌어들여

    재만 한인사회의 국민적·군사적 기반을 임시정부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흥사단원이며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이유필(李裕弼)이 임무를 띠고 만주에 파견되었다.

    이유필은 정의부의 이탁과 김동삼·오동진 등을 만나 개헌의 취지를 설명하고, 임시정부 각료 취임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의사를 신민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한 뒤 참의부를 방문하고 6월 중순경 상해로 귀환하였다.

    이와 같은 물밑작업 끝에 1925917일 재만 한인들의 지도자이며 서간도

    한인사회의 지도자인 이상룡이 상해에 도착하여 923일에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926년 무렵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상용이 국무령으로 취임 얼마 후 국무령 자리를 그만두었고, 후임으로 임명된 양기탁마저 취임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어 국무령에 내정된 홍진이 취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졌다.

    건물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궁색함이 극에 달하자 임시정부 존립에 대한 논란이 종종 제기되었다.

    192658일 임시의정원에서는 도산이 상해로 돌아가기도 전에 도산을 국무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취임을 사양하고 자연인의 자격으로 임시정부 유지와 대혁명당 조직의 결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을 공언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도산은 522일 환영회 석상에서 주의를 초월하여 역할분담하여 혁명을 진행시킬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 192678일 삼일당에서 개최된 연설회에서도 도산은 임시정부가

    조선은 독립국임을 선언'한 종지(宗旨) 위에 건설한 역사적 관계를 설명하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상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며

    임시정부가 집세조차 내지 못하고 국무령할 사람을 임명하지 못함을 모두의 책임이라고 통탄하였다.

    그리고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으로서, 임시정부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도산은 임시정부의 존립과 대독립당 결성을 위해 무엇보다도 북경을 유력시하였다.

    당시 북경은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대동단결을 도모하고자 여러 흥사단 단원들이 파견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도산이 유일당의 출발점을 북경으로 삼은 것은 그만큼 독립운동의 통합을 위해서는

    반임정 세력이 집결되어 있는 북경 지역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261016일 유일당 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남경(南京광동(廣東무한(武漢) 등 각 지역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들 촉성회 대표들이 모여 192711월에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결성하고

    만주·미주·노령 지역의 촉성회 결성을 촉구하였다.

    북경의 운동 세력을 유일당 촉성회로 결집시킨 도산은 1927114일경 만주 길림으로 들어갔다.

    일제는 만주에서의 도산의 활동에 대하여 예의 주목하고 안동현 일본영사관을 중심으로 도산 체포를 위하여 각 방면으로 동정을 살폈다.

    이즈음 도산은 만주 각 현에 소재한 단체 대표들을 소집하여,

    3부의 지도자들과 함께 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기본 강령을 세우고, 의견을 일치시켜 나갔다.

    민족의 대단결을 호소하며 경제적 발전을 역설한 도산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하여 순회 강연회를 기획하였다.

    길림 지역 한인들의 움직임을 계속 정찰하였던 길림 일본영사관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경무국 특파원은 이러한 정황을 위급 상황으로 판단하였다.

    1927127일에 최명식(崔明植)이 경영하는 정미소인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大東公司)에서

    도산은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길림에서 3부통합의 협의가 진행되고 있던 때였으므로,

    ·북만주 각 운동단체의 주요간부 및 군인들과 민간 유지들 약 500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연설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나자 20여 명의 중국경찰이 연설장으로 뛰어들었고,

    도산을 비롯한 연설회에 참가한 독립지사들을 무장한 200여 명의 중국경찰이 연행해 갔다.

    길림경찰청 당국은 길림집회가 공산당을 선전하는 집회라는 일본 관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었다.

    길림 일본영사관측에서는 연행된 42명의 신원을 즉시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국당국은 체포인원 대다수가 길림주민이기 때문에 취조가 일단락되기 전에는 인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도산이 피체되자 길림의 한인들은 길림관청과 봉천 당국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시위행진을 하였고, 각처 언론기관을 통해 여론을 일으켰다.

    이 소식이 상해로 전해지자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흥사단, 노병회 등 각 단체에서는 북경정부와 길림 당국에 석방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기민한 대처로 도산은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 후에도 도산은 재만 동포들과 혁명운동의 방침을 토의하고, 이를 조직으로 결성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 결실은 192741일에 길림사건의 현장인 대동공사 내에서 협동조합적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길림사건이 발생한 후 1개월 뒤였다.

    1925년에 설립된 <만주농업사>가 외적 압박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자

    도산은 다시금 재만 한인사회를 민족혁명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재건설하고자 한 것이었다.

    양기탁 등 만주지역의 혁명 거두들은 한계에 빠진 유일당 운동의 활로를 개척하고

    비참한 한인사회를 구제하는 데는 먼저 경제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다시 동맹하였다.

    길림에서 상해로 돌아온 도산은 1927816일 상해 삼일당에서 열린 환영회 석상에서 재만 동포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즉 중국인들에 의하여 학교가 폐쇄되고 빈민이 400만 명에 달하며, 중국인 토지경작의 소작료가 과거 2할에서 6할로 인상되었고

    독립군들도 먹을 것이 없어 곤란함이 막심하다는 보고로 울분을 터뜨렸다.

    이 연설을 통해 도산은 우리에게 불평을 주는 자는 오직 하나이니 곧 일본 제국이다.

    민족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하는 분별이 혁명운동에게서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민족 전체가 일본에 대항하여 분투해야만 함을 강조하였다.

    1927713일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이 깨어져 중국 내의 공산주의운동이 치열해지면서

    독립운동계의 좌우 분열은 더욱 심각해 졌다.

    이러한 가운데 192711월에 5개 촉성회 대표들이 상해에 집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동연합회는 대표 2인을 만주로 파견하여 만주에 유일당 결성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조직방법론에서 견해차이가 드러나 유일당운동은 공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도산은 한인 내부의 문제로만 전선통일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이미 <중한호조사> 결성 등 한인 혁명세력과 중국 혁명세력간의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광동정부를 상대로

    한인독립운동의 진상을 선전하는 둥 중국인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지속해 왔던 도산은 단순한 선전활동 차원이 아닌

    공동의 적 일본을 향한 동지적 관계임을 중국 측에 강조함으로써 확실한 한·중의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 정세의 흐름은 유일당운동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뜨렸다.

    19281210일의 코민테른에서는 12월테제를 통해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의 영향을 받아

    그나마 참여하였던 사회주의 세력들이 유일당운동에서 이탈해 갔다.

    도산은 과연 나라를 잃은 한민족에게 주적(主敵)인 일본을 두고 계급문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회의하였다.

    또한 도산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주의자들은 흥사단을 부르조아 계급의 결집체로 매도하고 있었다.

    이에 도산은 그간 독립운동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단체로서, 일정하게 정치운동을 배제하였던

    입장을 떠나 1929년에 국내 및 미주에 있는 모든 흥사단원들에게 흥사단이 수양단체'가 아닌 혁명훈련단체'임을 천명하였다.

    192929일 도산은 현지 한인들의 초청으로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결성하였고, 각지를 답사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도산은 모범촌 후보지를 조성하고자 북경 부근 서산(西山) 일대·남경 부근 하촉(下蜀) 일대·

    만주 길림성 송화강 연안 일대를 물색, 답사하였지만 정치적 혼란에 빠진 중국 일대에 횡행하는 비적(匪賊)떼들 때문에

    안정된 지역을 확보할 수 없었다.

    사업 착수는 점차 지연되었고 양자강 연안 진강 부근의 토지를 차입했다고 하나 이것도 중도에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192911월의 광주학생운동 소식에 접한 도산은 이때를 독립운동단체 규합의 적기로 보고,

    유일당 원칙에 찬동하는 각 단체만을 규합하여 1930125<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3월말에 천진으로 가서 그곳에서 남·북만주와 미국·노령에 산재한 사상단체의 각파 대표회의를 개최하고자

    45일자로 장문의 선언서를 배포하고 아울러 통신원을 파견하였다.

    천진에서 <대한대독립당주비회(大韓大獨立黨籌備會)>를 구성한 도산은 동회의 명의로

    615일에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을 창간하였다.

    도산은 민족주의의 목적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민족평등 실현을 기하는 데 있고”,

    일본제국주의는 중한혁명의 공통의 적으로 규정하여 한국과 중국의 동반 관계를 재삼 강조하였다.

    일제의 정보에 의하면 도산은 410일에 천진에서 다시 북경으로, 그리고 이후 다시 천진으로 이동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만주의 한인들은 더욱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간 공동의 적을 가진 동지적 관계로 보았던 한인들을 일제의 주구배로 인식하게 된 중국인들에게 더욱 배척받았던 것이다.

    도산은 중국과의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임시정부 명의로 12일에

    동삼성한교문제(東三省韓僑問題)라는 중국어 팸플릿을 작성하여 만주 각 현의 관공서에 배부하고,

    한인과 중국인들은 공존공영해야 함은 물론, 공동으로 일제를 물리쳐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도산은 중국의 혁명동지들과 공동의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다.

    도산은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1931710<한인각단체연합회>의 재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들 여러 단체의 대표들은 중국 당국 인사들과 항일연합전선 구축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도산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한중합작의 항일투쟁기구를 조직하고자, 19311027일 중국 동북대표들을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산은 시국대책에 관한 연설을 하고 아울러 한중합작을 통해 일본을 타도시킬 것을 호소하는

     중국동포에 경고한다는 문서를 배포하여 한중연합투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로 11월부터 우선 민족진영만으로 중국측과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할 조직체인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19324월 도산은 피체되었으나, 유일당운동과 중국과의 대일전선통일운동은 한국독립당의 이유필·송병조,

    북경·천진 지역의 민족운동가 대표 김규식, 만주 조선혁명당의 최동오에 의해 계속 진행되어

    193210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11월에는 <중한민중대동맹>으로 결성되었다.  




    옥고와 국내 활동


    1932429일은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군·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린 쾌거의 날이며, 도산이 일제에 피체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 도산은 조상섭 목사의 손자 돌잔치에 갔다가 소년동맹단에 기부금을 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소년동맹 단장인 이만영 소년을 만나려고 이유필(이만영의 부친)의 집으로 갔다가,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을 급습한 프랑스 조계 공무국과 일제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하여 연행되었다.

    도산은 피체되기 전인 1932116일자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일찍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작정한지 오래였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한지 오래였을 뿐더러

    당신도 우리 민족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는 바이라.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며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던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뿐입니다라고 하여 마치 앞날을 예견하듯 비장한 각오를 표하였다.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인도되어 심문을 받은 도산은 그 해 67일 인천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심문조사 후 4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

    도산은 공소권을 포기하고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6개월의 옥고를 치루다가

    형기를 22개월 남기고 1935210일 가출옥하였다.

    도산은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일경의 감시와 방해를 무릅쓰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한 후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때 도산은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였지만 국내 흥사단 조직인 <동우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된 이래 민족주의계열로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동우회><흥업구락부>뿐이었다.

    당시 동우회는 학계·언론계·산업계 등에서 활약하는 부르주아 계층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주로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일제는 그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동우회는 1931년 이후 조직을 확대하여 서울, 평양, 선천, 안악, 강서, 부산, 신의주 등으로 단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1933년에는 약법을 수정하여 대공'의 정신을 적극 발휘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분투 노력할 것과

    민중교양과 협작운동을 통한 사회공작'활동을 전개함을 기본활동으로 규정하였다.

    러자 일제는 동우회의 이러한 변화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대륙침략을 단행하고 한민족에게 황민화와 민족말살을 획책했던 시점에서

    일제는 동우회 회원들에게 민족운동 포기에서 나아가 일제에 충성을 맹세케 하는 확실한 전향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동우회를 신간회 해소 이후 가장 유력한 단체로 부각시키면서 동우회가 표면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집요(執拗)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고 주목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 총독부에서는 동우회 이사회 소집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모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하라고 강압하자,

    동우회는 일제의 태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76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총검거가 시작되었다.

    도산은 송태산장에서 피체되어 서울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동우회사건으로 회원 181명이 피체되었고, 1·2심을 거쳐 41명에게 치안유지법 및 제령 7호 위반의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도산은 경기도 경찰부에 수감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동우회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8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도산이 숙환인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위급한 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1224일 시급히 도산을 보석시켜 경성 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게 하였다.

    당시 도산은 위하수증·간경화·만성기관지염 증세로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친형 안치호와 생질인 김순원 등 몇 몇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3831005분에 6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도산이 서거한 이후에도 일제는 흥사단을 전향시키고자 온갖 회유 및 탄압을 가하였다.

    이를 이기지 못하고 몇몇 단원들의 명의로 1938618일에 전향'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민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도 같은 해 93일자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들의 전향성명서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문장인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총독부가 작성한 원안에 그대로 서명을 강요받았거나, 혹은 강압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일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검거로 민족주의단체는 거의 박멸(撲滅)되었다고 보았다.

    도산이 작고한 후 일제는 동우회 사건에 대해 19391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검사의 공소로 19408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41명 기소자 전원이 5년 내지 2년의 실형 혹은 집행유예를 언도 받았다.

    그러나 19411117일에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져, 동우회사건은 일어난 지 45개월만에 종결되었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는 우리나라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였으며, 민족주의 사상가로 큰 삶을 살았다.

    안창호는 우리 겨레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 속에 고통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민족과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되찾고자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자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 1894년 구세학당에 입학, 189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독립협회가 해산한 후

    1899년에는 고향인 강서군에서 점진학교를 개설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2년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한 뒤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재미한안사회를 지도하였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1909에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는 등 구국운동을 총지휘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을 눈앞에 두고 망명한 안창호는 러시아령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를 순회하면서

    재외 한인 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1911년 미국으로 돌아간 안창호는 흥사단을 조직하고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동포의 단결과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3.1운동 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비와 조직을 위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졌다.

    또한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통합임시정부 노동국 총판에 임명되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활성화를 위하여 독립운동 방략을 세우고, 연통제 교통국을 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항공기 도입을 추진하고 흥사단원 및 청년들에게

    비행사 양성훈련을 받게 하는 등 항공력을 이용한 독립운동을 역설하였.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를 추진하고 주도하며 민족투쟁 역량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만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25년에는 미주 동포의 단합과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건설과 민족유일당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미국 전역을 순회하였다.

    1926년 중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1927년에는 대독립당 건설을 추진했으며,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1932년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5년 가출옥한 안창호는 전국을 순회하고 송태산장에 은거허였다.

    그러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피체되었으며,

    1938년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서거하였.




    도산안창호기념관 현충시설 지정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74조의 2 1항의 규정에 의하여 현충시설로 지정합니다.

    - 국가보훈처 -




    도산 안창호기념관 건립기(島山 安昌浩記念館 建立記)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선생이 이 나라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의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고자 조성하였다.

    이곳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도산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는 동시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였다.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60평생을 몸 바친 위대한 지도자이며, 겨레의 스승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이 보여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을 본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고자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는 1998119일 이곳에 도산 안창호기념관을 세웠다


    1998. 11. 9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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