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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라가자(水刺架子) - 임금님께 올리는 식재료와 음식물을 나르는 수레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8. 12. 11. 05:02

    수라가자(水刺架子) - 임금님께 올리는 식재료와 음식물을 나르는 수레




    수라가자(水刺架子) - 임금님께 올리는 식재료와 음식물을 나르는 수레


     나라의 음식문화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 먹어왔던 그대로 이어질 수가 없다

    외세로부터 영향을 받으므로 음식문화는 전환기를 갖게 되고 후반기가 그에 해당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연희음식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18, 19세기가 궁중의 식문화를 가장 중흥시킨 시대라고   있다.

    왕의 일상식사에 대한 표현은 조선왕조실록 다양한 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선(常膳평상시의 식사법선(法膳)), 수라(水刺조수라주수라석수라죽수라별수라(別水刺), 

    어반(御飯)), 어선(御膳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임금에게 진상하는 음식), 

    시간에 따라 조선(朝膳), 석선(夕膳), 주선(晝膳또는 오선(午膳)이라고 했다

    주방(廚房) 음식에서 만든 음식이라 하여 주선(廚膳)이라고도 하였다.

    일상식의 관련행위로는 음식을 드시는 일로 식선(食膳), 음선(飮膳), 진선(進膳임금에게 수라상을 바치는 임금이 어선을 드시는 ), 

    그리고 임금에게 드릴 수라상의 음식과 기구들을 미리 검사하는 것으로 사옹원 제조 임무를 받았던 감선(監膳) 있었다

    또한 왕이 대비의왕비나 왕세자가 임금의 수라상을 손수 보살피던 시선(視膳) 있었는데어른들을 위한 효성스런 음식수발을 친히 들었다

    왕들은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음식을 줄이는 감선(減膳)이나 

    육선(肉饍) 금하는 소선(素膳) 통해 검박정신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감선(減膳) 이유로는 검소함 이외에도 한재수재천둥난리상중이나 기일에도 음식이나 식사의 수를 줄이기도 하였다.

    궁중의 일상식을 가장  나타낸 기록은 18세기 대표적인 궁중의 식문화기록인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상인 것은 없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 19(1795) 모후인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빈) 갑년(甲年회갑) 맞아 

    화성(華城) 현융원(顯隆園) 행차하여 잔치를 베푼 기록이다

     의궤는 왕과 자궁(慈宮혜경궁 홍씨) 여형제들이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  식단이 찬품(饌品)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린 진찬이 있었던 특별한 날이나 행로 중에 끼니 사이의 공복을 채우고 

    보양식의 개념으로 올렸던 미음을 제외하면자궁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5-6 상차림을 받았다.

    수라는 밥을 위주로 하여 반찬을 차리는데올리는 시간에 따라 조수라(朝水刺주수라(晝水刺석수라(夕水刺) 나뉜다

    반과상은 올리는 시간이나 상차림의 규모에 따라 조다소반과(早茶小盤果)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만다소반과(晩茶小盤果)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주다별반과(晝茶別盤果등으로 지칭되는데국수를 위주로  다과상차림이다.

    왕의 수라는 같이  군주와 같은 상차림이며 동행한 내외빈(內外賓궁인(宮人제신(諸臣등도 

    그릇수를 적게  반상을 차려주거나 두레반식으로 차리는 상차림으로 식사를 제공한다

    내빈의 일상식  조반(朝飯) 경우 조치(助致찌개),  3가지침채(김치),  등을 유기그릇에 담아 흑칠을  독상이다

    5명의 외빈은  5그릇 5그릇 1그릇침채 1그릇 1그릇이 담긴 상을 받았다

    30명의 궁인(宮人)들은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함께 먹도록 하였는데, 3(), () 3( 꼬치구이) 30곶이 제공되었다

     밖의 제신들은 독상을 받는 당상낭청  높은 관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낮은 직급들의 경우 

    행담(行擔상자) 담은 밥과 동이 담긴 항아리()  침채를 받아 나누어 먹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취반군은 많은 인원이 차출되었으며식재료나 음식은 수라가자(水刺架子) 실고 원행  들르는 행궁마다 

    5~10칸짜리 임시 수라간(水刺假家) 설치하여 자궁정조 군주에게 올릴 음식을 준비하여 상차림을 차려냈다.

    혜경궁 홍씨의 수라상은 13 또는 15기를 흑칠을  다리가 있는 원반(元盤) 협반(俠盤)으로 2개의 상에 차리는데

    원반에는 은기에 담은 12(음식을 차리고협반에는 화기 그릇에 담은 3 음식을 차렸다.

     '()'라는 그릇의 수인데() 그릇수로 치지 않았다.

    자궁의 수라상에는 원반에는 (), (), 조치(助致), 구이[炙伊], 좌반(佐飯), 

    숙육(熟肉), (), (), 침채(沈菜), 담침채(淡沈菜), (등이 오른다

    협반에는 (), (), (), 만두(饅頭), (), (), 각색어육  동물성 식품을 주로 사용한 음식류가 차려졌다

    같은  같은 시각의 왕의 수라는 자궁과 달리 협반을 따로 차리지 않았으며

    흑칠족반(黑漆足盤하나의 상에 7 음식을 유기그릇에 담았다

    조치나 침채찬수를 줄여 차렸다.

    미음(米飮)상은  () 들르거나 중로(中路)에서 혜경궁 홍씨와  군주에게만 올렸는데

    미음 1그릇고음 1그릇정과 1그릇을 차렸다.

    다소반과에는 (), 만두(饅頭), (), (), 전유화(煎油花), 어채(魚菜), 편육(片肉), (), 

    (), 다식(茶食), 각색당(各色糖), [], 유밀과(油密果), 강정(強精), 율란(栗卵조란(棗卵), 

    정과(正果), 생과(生果), 수정과(水正果), (:), (등을 사기그릇에 담았는데

    국물이 없는 음식들은 3-5(9-15cm 정도)으로 고여 상화(床花) 장식하였다

    대전  군주의 반과상은 자궁상 보다 7-11그릇으로 적게 차리며고임의 높이도 2-5촌이었다

    대전의 반과상에는 고임음식에 상화가 없었고군주의 경우 상화는 있지만 자궁의 반과상 보다는 적었다.

    정조는 미리 수라 찬품을 조사하고 혜경궁 홍씨를 맞아들이며왕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특히 정조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어머니에게는 최대한 아끼지 않고  차려드렸지만 본인은 매우 검소함을 보인 것을   있다

    예행연습을 하는 도중 신하들이 행행  과잉충성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 지침을 내린  

     "진이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 "왕의 수라는 10 그릇을 넘지 않도록  " 엄명하였다.

    임금님의 식사를   하는지 얼마나 드시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일상식의 기록이 남아있는 정조대만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행(行幸)중이라는 상황이나 정조가 내린 지침의 내용을 보면 상차림의 횟수나 종류

    음식내용이 본궁에 기거할 때의 일상식과는 다소 다를 것임을 짐작할  있다.

    200   궁의 엄중한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 궁중식문화를 살펴보며 한국음식의 기본조리법은 지금과 다름없이 변치 않았으나 

    토종의 식재료들은 많이 바뀌었음을   있고 한상에서 골고루 갖추어먹던 상차림이 많이 간소화된 것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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