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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몽촌토성(夢村土城) - 사적 제297호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9. 2. 1. 04:30

    서울 몽촌토성(夢村土城) - 사적 제297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과 방이동 일대 자연구릉지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축조한 타원형에 가까운 마름모꼴의 성곽이다.

    성곽의 전체둘레는 2,285m이며 외성을 합할 경우 총면적은 302,500에 달하며

    8,000~1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토성 내의 마을이름인 '몽촌'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은 본성과 이보다 작은 외성으로 되어 있고, 그 내부에서 백제 초기의 움집터와 기와 및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류 가운데는 백제의 대표적 토기라 할 수 있는 삼족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몽촌토성이 백제의 성곽임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몽촌토성은 백제의 초기 왕성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가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몽촌토성 목책(夢村土城 木柵)


    서울 몽촌토성은 서울 풍납동 토성과 함께 백제 한성도읍기의 도성으로 주로 전쟁 기간에 왕이 머물던 곳으로 보인다.

    1984~1985년에 실시한 몽촌토성 성벽 발굴 조사에서 서북쪽과 동북쪽의 성벽 바깥쪽 비탈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cm 깊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나무를 박아 기동을 세운 목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보조 기둥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목책의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m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목책은 기둥 흔적이 발견된 자리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고대 문헌에는 성책(城柵)’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서

    목책이 성곽과 더불어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목책 관련 기록이 많아 삼국 가운데 목책을 가장 활발히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남쪽 왕성 몽촌토성, 강력한 고대국가 백제의 위상을 드러내다!


    이곳은 곰말다리라고 부릅니다. ‘곰말은 우리말로 꿈마을이며, 한자로 표현하면 몽촌(夢)이 됩니다.

    곰말다리와 몽촌토성은 전혀 다른 이름 같지만 같은 이름인거죠.

    이러한 지명에서 유래한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같이 판축기법을 일부 사용했지만

    주로 남한산의 산줄기와 한강변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백제의 왕성입니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백제에는 두 왕성이 있었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바로 북성(北城)인 풍납토성과 남성(南城)인 몽촌토성입니다.

    풍납토성(風納土城, 사적 제11)3세기 이전에 쌓은 백제 초기 왕성으로서 한강변의 평지에 있고,

    서해와 연결된 해상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4세기 이후 근초고왕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며,

    고지대에 있어 전시에 방어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몽촌토성의 건축은 백제가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 사적 제297


    현재는 평지성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자연 구릉의 끝 부분에 쌓은 일종의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285m이고, 높이는 640m로 지점에 따라 차이가 크다.

    성벽 바깥쪽에 목책이 있으며, 동쪽·북쪽·서쪽으로는 성내천이 토성을 감싸고돌아 성 주위를 둘러싼 해자(垓字) 역할을 한다.

    성벽 동북쪽 작은 구릉에는 둘레 270정도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나무로 세운 보루가 있다.

    이곳 토성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백제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각종 집터와 건물터, 저장 구덩이가 많이 나왔으며 연못이 있었다.

    수천 점의 토기와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들, 뼛조각으로 만든 갑옷 등도 출토되었다.

    서기 475년에 고구려의 3만대군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군이 먼저 한성의 북쪽 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해 함락시키자,

    남쪽 성에 있던 백제 개로왕이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백제의 왕도(王都) 한성(漢城)이 북성(北城)과 남성(南城) 2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대개 북성이 지금의 서울 풍납동토성, 남성이 서울 몽촌토성이라고 보고 있다  




    몽촌유허비(夢村遺墟碑)





    몽촌헌성비 건립 취지(夢村獻誠碑 建立 趣旨) 


    우리의 조상(祖上)들은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곳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한 몽촌(夢村)에서

    터 잡아 살면서 이웃주민과 다정한 교분으로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룩하며 살아 오셨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살아오던 중 1968년 국제경기장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개최지로 확정되어 우리 몽촌 주민은 정든 고향을 떠나 인근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작은 정성을 모아 느티나무 아래 이 비를 세워 길이 보존하고자 한다.

     

    행정구역 변천사

    1963년 이전 :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2(夢村)에서

    196311:서울특별시 성동구 이동(二洞)으로 행정구역 변경

    1975101: 대통령령(大統領令) 7816호로 강남구로

    1979101: 대통령령(大統領令) 9630호로 강동구로

    198811: 대통령령(大統領令) 12367호로 송파구로 조정됨.

     

    1985410: 몽촌향우회 창립

    1985530: 몽촌 전 주민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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