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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불교조계종 미륵세계사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9. 2. 16. 04:30

    충주 미륵대원지와 미륵세계사


    세계사는 원래 명칭이 미륵세계사이고,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를 터전으로 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나말 여초에 창건된 석굴 가람지로 추정되고 있다.

    석등 2, 당간지주(연화문), 대좌, 석귀부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들도 갖추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56대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여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조성하여 남쪽을 바라보도록 마애불(磨崖佛)을 만들고,

    마의태자는 석굴 가람을 조성하여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현재 미륵세계사에 의해 불법의 등불을 이어가고 있다. 미륵세계사는 1960년에 창건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충주 미륵대원지 당간지주(忠州 彌勒大院址 幢竿支柱)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竿)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있는데 간대 윗 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 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忠州 彌勒大院址 石造龜趺)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cm, 높이 180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귀갑문(龜甲紋)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陽刻)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龜趺)의 등 가운데에 비좌(碑座)가 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碑石) 조각조차 찾지 못하였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忠州 彌勒大院址 四角石燈)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

     

    이 석등(石燈)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火舍石)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사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하대석(下臺石)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竿柱石)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火舍石)이 있는데,

    4면에 화창(火窓)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屋蓋石)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조각하였다.

    석등은 사찰에서 중요 법당이나 석탑 등의 정면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불교에서 석등은 불을 밝혀 어두운 곳을 비춘다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부처의 자비와 진리에 비유되는 빛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忠州 彌勒里 五層石塔) - 보물 제95


    높이 6m로 단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세웠으며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찰주가 남아있다.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운 큼직한 4각형 돌로 우주, 탱주의 표현은 없다.

    갑석은 매우 좁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갑석 하면에는 형식적인 부연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뚜렷한데 중앙에 역시 형식적인 2단의 고임이 모각되어 있다.

    탑 신부는 1층 옥개석이 2매 일 뿐 옥신이나 다른 옥개석은 1매씩이다.

    각층 옥개(屋蓋)에는 옥신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우주를 모각하여 형식적인 느낌을 주며 각 층의 체감(遞減) 비율도 고르지 않다.

    옥개석(屋蓋石)은 일반형 석탑(石塔)의 비례를 따르지 않고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전체의 균형과 미관이 살아나지 못한 느낌이다.

    옥개 받침은 초층이 6단이고 2층 이상은 5단씩이지만 처마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 밑은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급하고 전각의 반전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옥개석 상면에는 낮은 고임 1단씩을 모각하여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 또한 형식적이다.




    공기돌 바위(비지정)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人工)이 가미되었으며,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정상 부분에 좁은 폭()으로 길게 홈을 파서 그 홈을 따라 바위 밑 부분까지 물이 잘 빠지도록 되어있다.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기돌)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때의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 - 사적 제317


    이 절터는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말부터 3차에 걸쳐 절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초(彌勒堂草) 등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로 불리고 있어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사역내에 석불, 석탑, 석등, 당간지주, 돌거북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석불을 둘러싼 ''자 형 석실은 경주 석굴암의 조영의사를 따른 것으로,

    원래 조각상들이 끼워져 있었으나 몽고 침입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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