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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악산 덕주사(月岳山 德周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9. 2. 18. 04:30

    월악산 덕주사(月岳山 德周寺)





    덕주사 연혁(德周寺 沿革)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9(서기586)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月兄山) 월악사(月岳寺)였으나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손국(遜國)한 뒤

    경순왕의 제일녀였던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높이 15m의 거암(巨岩)에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 보물 제406)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 하였으나 일생을 마친후 산의 이름을 월악산(月岳山)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德周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는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상덕주사는 1.5km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마애미륵불, 우공탑, 삼층석탑과 극락전과 요사터만 남아 있다.

    상덕주사는 195112월 전화(戰禍)로 소실되었으며 석축만 옛날 규모를 알려주고 있다.

    하덕주사는 어느 때 절이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절 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원시 신앙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3m나 되는 탑, 기단석, 부도, 연꽃문양, 석등, 와편 등이 절터였음을 증명한다.

    현 대웅보전은 옛 하덕주사가 수재의 위험이 있어 1996년 성일화상(性一和尙)이 새로이 절터를 마련

    전면 5, 측면 352평의 외5포 내9포의 건물양식으로 창건했다.

    전각안에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이 법신불로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며

    자성으로 청정법계의 진여인 실상의 법을 시현한 자성불이다.

    오른편 부처님은 보신불로 과거 원력수행의 한량없는 과보로 나타난 만덕이 원만한 불신이며,

    화신불 또는 응화신 이라고도 하는 왼편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가자지 모습으로 변화해 구제하는 불신이다.

    (전각내부후면 1536불 봉안)






    덕주사 대웅보전(德周寺 大雄寶殿)












    남근석(男根石)


    덕주사가 자리한 월악산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靈峰)이라 칭하는데

    산정상을 영봉이라 칭하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두 곳 뿐이다.

    덕주사 뒷편 수산리쪽에서 보면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모습과 닮은 형태이다.

    옛사람들은 태양()을 양(), ()을 음()이라 했으며 사람과 비유해서는 양을 남자(男子), 음을 여자(女子)라 말했다.

    이 산이 여자의 모습을 한산이라 해서 월악산(月岳山)이라 칭한 것 같다.

    또한 월악산이 풍수학으로 볼 때 음기(陰氣)가 왕성한 산이기에

    옛 선조들은 월악산의 음()의 지기(地氣)를 누르고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을 세운 것 같다.

    월악산 덕주사에 전해오는 남근석은 3개로써 크기가 길고 하나는 작은데 그중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진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한 예()로 경북 안동을 안고도는 영남산맥 중 한곳에는 뒷산이 여근형(女根形)이라하여 그 왕성한 음기를 중화시키고자

    그 여근산과 대치되는 곳에 세 개의 남근석을 세웠는데 이 풍수석주(風水石柱)들은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덕주사의 세 개의 남근석과 안동에 있었다는 세 개의 남근석과는 풍수상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덕주사의 남근석이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시키고자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나

    또 소망(所望)과 행운(幸運)을 기구하는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없어진 남근석 윗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삶과 죽음을 이원화 시키지 않았다.

    인간의 생()은 유한(有限)하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그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과 양(),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조상들은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영원과 불변의 진리를 체득했으며 여기에서 탄생되어진 것이 제의(除儀)였고

    어떤 매개체를 통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원을 추구했으며 그것이 민간에 전승되어 구원의 형태로 내려왔다.

    그들은 대상물에다 고사와 행복을 기구하며 풀이를 했다.

    우리가 드물게 마을 어귀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괴기스런 표정이나 여기 덕주사에 있는 남근석등이 바로 생과 삶

    그리고 윤회의 진리를 체득한 우리 조상의 지혜로움이 응축된 상징(象徵)인 것이다.







    덕주사 산신각(德周寺 山神閣) 


    덕주사는 하늘과 땅의 서기(瑞氣)를 서로 잇는다는 월악산 영봉(靈峰)의 중턱에 자리한 신라(新羅) 고찰(古刹)이다.

    우리민족은 산()이 신성한 곳으로써 우주의 생명력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곳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산의 신령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산신 숭배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그들의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며 법에게 제사 드리며 그 산을 신으로 섬긴다" 하였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본기(本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환웅(桓雄)은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웠으며,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아사달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산신숭배(山神崇拜)는 단군설화(檀君說話)에서부터 시작하여 민중종교로 도착된 뿌리 깊은 민간신앙이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어 대승적(大乘的) 차원으로 산신신앙을 하나의 정신으로 불교에 수용하여

    체계적인 산신신앙이 되었음은 전국의 모든 사찰에 봉안된 산신과 산신의례(山神儀禮)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사찰 내에 처음 산신신앙이 수용되었을 때에는 산신도(山神圖)가 형성되지 못하고

    문자화된 위패(位牌)나 신패(神牌)를 모시는 산령각(山靈閣)만이 있었다.

    산신도를 봉안하기 시작한 시기는 단기 413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산신을 마을의 안녕과 생명을 보호하며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管掌)하는 신으로 숭배하다가

    사찰 내에 호법선신(護法善神)과 일반 대중들의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덕주산 산신각은 단기 4326년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터에

    성일화상(性一和尙)이 가로 180Cm, 세로 210Cm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陽刻)해 봉안하니

    월악산 영봉의 산신이 이곳에 외호신으로 안주해 참배자의 염원을 섭수하게 되었다.

    이후 보림화상이 산신각 중창불사를 하여 월악산 덕주사의 산신각은 국내 최고의 영험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덕주사 범종각(德周寺 梵鐘閣)






    동양의 알프스, 월악산 영봉(月岳山 靈峰)


    해발 1,097m의 고봉준령으로 소박하면서도 웅혼 장대한 남성적인 산으로

    신라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한을 담은 마애불상을 비롯하여 덕주산성 등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 5악의 하나로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 영봉이라 불리고 송계 8, 용하 9곡을 이루니 이름하여 월악 100경이다.

    천연기념물 제217호인 산양과 희귀 야생약초인 고본이 자생하며

    생태적 보전가치와 자연경관이 우수하여 충북의 자연환경명소 10로 지정된 곳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5-1번지





    덕주 마애불(德周 磨崖佛) - 보물 제406


    마애불의 역사 월악산 중턱 "덕주 마애불"엔 덕주공주가 오빠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신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하늘재)에 이르러 마의태자의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서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일행은 그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 마애불이다.
















    테마가 있는 덕주역사자연관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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