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왕인사당(王仁廟)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4. 13. 04:30

    왕인사당(王仁廟)




    백제문(百濟門)




    전시관(展示館)





    전시관 내부의 왕인박사 일대기 그림




    탄생도(誕生圖)


    갓 돌을 지낸 왕인박사(王仁博士)가 전형적인 토담방에서 친척(親戚)과 마을 사람들에 둘러 싸여 축복(祝福) 받는 모습




    오경박사 등용도(五經博士 登用圖)


    왕인박사(王仁博士)가 문산재(文山齋)에 입문(入門) 10년 되던 18세 때 선학(先學)들의 권고로

    과시(科試)에 응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登用)된 후 선학(先學)들의 축복(祝福)을 받는 모습




    수학도(修學圖)


    왕인박사(王仁博士)가 서당(書堂) 문산재(文山齋)에서 이른 새벽 등잔불을 켜놓고 동문(同門)들과 공부히고 있는 모습




    도일준비 책굴도(渡日準備 冊窟圖)


    왕인박사(王仁博士)가 서재(書齋)로 이용하던 석굴(石窟)에서 일본에 가지고 갈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손수  쓰고 있는 모습




    도일도(渡日圖)


    백제(百濟) 때 무역항(貿易港)인 상대포(上台浦)에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

    손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들고 고향땅인 월출산(月出山)을 마지막 바라보는 모습




    제지도(製紙圖)


    월출산 문필봉(文筆峰) 주변에 자생하는 닥나무를 문산재 주변에 옮겨 심고

    문산재(文山齋) 입구 지침바위(地砧岩)에서 제지공(製紙工)들과 종이를 만든 후 기뻐하는 왕인박사의 모습




    학문전수도(學文傳授圖)


    왕인박사(王仁博士)가 도일(渡日)하여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사부(師傅)가 되어

    황실(皇室)의 귀족(貴族)들에세 학문(學問)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




    묘역도(墓域圖)


    일본 대판부(大阪府) 매방시(枚方市)에 있는 왕인박사 묘역(王仁博士 墓域)으로

    1938년 5월 대판부 사적(大阪府 史蹟)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참배객들이 줄을 서고 있는 모습



    古事記(中卷 應神天王 條)

    이 시대에 아마베(海部), 야마베(山部), 야마모리베(山守部), 伊勢部를 정하였다.

    그리고 쯔루기노이케(劍池)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또 신라인들이 건너 왔다. 그리하여 타케우찌노스쿠네노미코노가 이들과 함께 관개용수를 위한 백제지(百濟池)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제의 국왕인 조고왕(照古王, 근초고왕으로 추축됨)이 암수 말 한필씩 아찌키시(阿知吉師) 편에 보내 왔다.

    - 이 아찌키시는 아찌키노후비토(阿直史)들의 선조이다 - 또 백제왕은 큰 칼과 거울을 보냈다.

    그리고 오진왕은 백제국에 '만약 현인이 있으면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보내진 사람이 와니키시(和邇吉師)였다.

    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모두 11권을 주어 함께 보냈다. - 이 와니키시는 후미노오토(文首)들의 선조이다.


    日本書紀(卷 第10 應神條)

    158壬戌 朔 丁卯(6), 백제왕이 아직기(古事記에는 阿知吉師)편에 양마 2필을 보냈다.

    그것은 坂上의 마굿간에서 기르게 하였다. 아직기로 사육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기판이라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래서 태자 우찌노바 까아라츠꼬(토도후랑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오진왕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

    왕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上毛野君의 선조인 荒田別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초청하였다. 아직기는 阿直岐史의 시조다.

     





    왕인묘(王仁廟)






    왕인박사 약력


    出生 : 백제 14대 근구수왕(서기 375 - 384) 때에 성기동에서 출생.

    人物 : 8세 때 문산재에 입문, 유학, 경전 수학, 18세 때에는 오경박사에 등용. 문장도덕의 군자임.

    일본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 백제 17대 아신왕 14년 일본국 '응신천황'의 초빙으로 32세 때 도일.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서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과 공예 등 백제의 선진문화를 전파시켜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역술. 역학, 관름불상등을 소지하고 직공. 치공. 도공. 화공 등 200여명을 대동(가족동반) 5척의 배로

    구림만 상대포에서 출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크게 이바지함.













    왕인박사유적지 - 전라남도 기념물 제20


    왕인박사는 이곳 성기동에서 태어나 학문을 연마하며 5세기 초 일본 응신천왕의 초빙으로 논어 10,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박한 경서의 지식으로 응신왕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주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은 물론 기술 공예의 전수 등의 공헌함으로써 당시 일본 조정의 스승이며

    정치고문이 되어 백제문화의 전수를 통하여 일본사람들을 계몽한 일본문화의 사상의 성인으로 아스카 문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곳에는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성천이 있으며

    또한 왕인박사가 공부를 했다고 전해오는 책굴과 문산재, 양사재가 있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뒤 후학들이 인재를 길러낸 곳으로

    매년 음력책굴 앞의 석인상은 왕인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일본으로 떠날 때

    동학, 문하생들과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보았다 하여 돌정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상대포는 일본으로 출발할 때 배를 탔던 곳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관문으로서 대단히 번창한 항구였다.

      왕인박사 유적지는 일본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유적지에서 왕인석상이 있는 등산로는 서해안 최고의 노을을 감상 할 수 있다.

    유적지 정문인 백제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일본에서 헌정한 왕인정화비가 있고 맞은편에 전시관이 있다.

      현재의 유적지는 1985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3년간 전라남도의 민. 관이 힘을 합쳐 정화사업을 한 것이다.

    또한 일찍이 열린 세계로의 이상을 실현한 왕인박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벚꽃이 만개한 4월에 매년 왕인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