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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황대(鳳凰臺) - 김천 연화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4. 15. 04:30

    봉황대(鳳凰臺) - 김천 연화지

























    봉황대(鳳凰臺)


    봉황대는 연화지, 김산향교(金山鄕校)와 함께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김천시의 옛 명칭)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처음에는 삼락동 마을 북쪽에 있었다.

    연대는 미상이나 창건 시는 읍취헌(邑翠軒)이라 했는데 김산 군수 윤택(尹澤)이 봉황루라 이름을 바꾸었다.

    김항주(金恒柱) 군수가 1771년에 중수하면서 봉황대(鳳凰臺)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792년에 이성순(李性淳) 군수가 개수하고 1838년에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연화지 못 가운데로 옮겼다.

    1896년에 윤헌섭(尹憲燮) 군수가 성금을 모아 중수하고 1978년에는 김천시청에서 개수했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를 지낸 윤택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 오르는 꿈을 꾼 후 길조라 하여

    솔개 연()자에 바뀔 화()자를 써서 연화지라 이름 지었고,

    날아간 봉황의 방향이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 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다.

    이 고장을 "삼산이수(三山二水)"라 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못 가운데 묏봉우리 셋을 쌓아 만들어 삼산이라 하면서 선비들이 다락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면서

    물에 비치는 산그림자를 바라보노라면 절로 시흥이 일어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하여

    이태백의 시 "봉황대에 올라"에서 따온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봉황대를 시제(詩題)로 한 옛 시인들의 시가 향지에 많이 나온다.


    삼산이수(三山二水)3개의 산과 2개의 물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곧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三山)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을 가리킨다.




    봉황대(鳳凰臺)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


    이 건물은 선비들이 자연과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정자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조선 영조(朝鮮 英祖) 47(1771)에 군수 김항주(金恒柱)가 구화산에 있던 건물을 산밑으로 옮기고 봉황대(鳳凰臺)라 하였다.

    그 후 정조(正祖) 16(1792)에 군수 이성순(李性淳)이 보수하였으나

    고종(高宗) 27(1838)에 붕괴되어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동왕(고종) 27년과 1978년에 보수가 있었고 계란 모양의 연화지(鳶嘩地, 鳶嘩池) 가운데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봉황대는 출입문인 일각문에 조양문(朝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일각문을 마주보고 있는

    정면3, 측면3칸 규모의 누각형식 건물(면적 35.64)이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마루방의 네 기둥은 4각기둥을, 나머지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겹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8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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