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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초정(芳草亭)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4. 17. 04:30


    방초정(芳草亭)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


    이 건물은 조선 선조(宣祖)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정복(李廷馥)1625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그후 1689년 퇴락한 것을 그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에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이의조(李宜朝)3창했다.

    정자는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설치하고 사방으로 마루를 꾸몄다.

    건물 중앙에 온돌방을 설치하는 구성은 호남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극히 드문 구성방식이다.

    온돌방은 벽이 없이 사면을 창호로 둘렀고 앞과 뒤로 출입문을 만들었다.

    화강암 장대석(壯大石)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온돌방을 구성하는데 네 기둥을 제외하고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2층으로의 출입은 건물 왼쪽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이용하였다.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영남지방의 정자로는 보기 드물게, 마루 한가운데에 한 칸 크기의 온돌방이 꾸며져 있으며,

    2층 누각의 중앙 온돌방에는 들문이 달려 있다.

    이 문을 걸어 올리면 넓은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는 구조이다.

    정자 중앙의 방 아래에는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구들이 있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최씨담(崔氏潭)


    방초정 정자 앞에 있는 연못으로 커다란 방지(方池)가 꾸며져 있으며 연못 가운데에 두개의 섬이 있다.

    최씨담의 섬이 두 개인 것에 대해서는, 최씨 부인과 몸종 석이의 무덤형태로 축조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의 연못에서 섬은 대개 삼신사상(三神思想)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이 있거나,

    또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내는 한 개의 섬을 조성해 두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곳에 두 개의 섬을 조성한 것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최씨와 석이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특이한 형태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연못을 하늘로 보고, 해와 달을 상징 하는 것으로 하여 2개의 섬을 두었다는 해석도 있다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정려각(旌閭閣)과 풍기진씨 열행비각


    최씨부인의 커다란 정려각과 함께, 최씨부인의 몸종 석이의 빗돌이 있다.

    몸종 석이의 빗돌은, 1975년 방초정 연못을 준설할 때 못에 묻혀있던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가 발견되어,

    화순최씨 정려각 앞에 다시 세웠다





    孺人豊基秦氏烈行碑(유인풍기진씨열행비)


    풍기 진씨는 진희태(秦喜泰)의 딸로 1912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으며,18세 때 연안(延安)인 이기영에게 시집을 가서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동기간에도 우애가 깊어 온 집 안의 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해 남편이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풍기 진씨가 하늘에다 자기 목숨과 대신해 줄 것을 빌었지만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마침내 대구에 있는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증상이 복막염으로 확대되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511월 초 대구 친정에서 남편이 사망하자, 풍기 진씨는 남편은 내가 죽인 것이다.”라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녀는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한없이 슬퍼하였다.

    무지했기 때문에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죽였다는 원통함과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이 그녀로 하여금 죽을 결심을 하게 했다.

    남편의 장례 준비를 손수 마련해 놓은 눈 오는 밤, 풍기진씨는 남편이 찬방에 홀로 누웠는데 내가 어찌 더운 방에서 자랴.”하며,

    얼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 눈이 오는 마당에 누웠다.

    그러나 곧 집안사람에게 발각되어 남편을 따르지 못하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의 시체 옆에 가서 반듯이 누웠다.

    그리하여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갔다.

    19351218, 풍기 진씨가 남편이 죽은 방에서 따라 죽 굶어 죽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哀悼文)과 제문(祭文), 만사(輓詞) 등을 보내 왔으며,

    19373월에는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

    (영남삼강록과 충의효열지 열부편에 기록되어 있는 글) 

     




    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절부부호군이정복처증숙부인화순최씨지여)


    절부 화순최씨는 임진왜란 때 혼인 직후 시댁으로 왔다가 왜적을 만나자,

    "왜적에게 욕보이는 건 깨끗하게 죽는 이만 못하다" 고 하여 못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니,

    이때의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이때 주인을 잃은 종 석이(石伊)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






    김천경찰서 구성파출소




    상원(구성면 상원리 마을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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