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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강 정철(松江 鄭澈) 가사(歌辭)의 터(址) 표석(標石)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9. 6. 2. 04:30

    송강 정철(松江 鄭澈) 가사(歌辭)의 터() 표석(標石)


    문화관광부에서 1991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정하고

    우리나라의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2개소에 세웠다.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이다.

    삼척과 담양에 세워진 송강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와 달리

    팔각형의 장대 장대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기단 8각의 각 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박물관 구실을 하도록 되어 있다.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36 (성내동) 죽서루 경내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仁宗)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해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의 명종(明宗)]과 친숙해졌다.

    10세가 되던 1545(명종 즉위 원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중에 죽고,

    부 유침은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야 해배(解配)되어 조부(祖父)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냈다.

    여기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1561(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 이어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선조 8)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훈민가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최영경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진주(晋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2주문답(酒問答)3, 훈민가16,

    단가잡편(短歌雜篇)32, 성은가(聖恩歌)2,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1,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1, 장진주사(將進酒辭)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고종 31)에 간행한 것이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보물 제213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1275(충렬왕 1)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403(태종 3)에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후 여러 차례의 수리로 인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정면 7,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원래 5칸이었던 것을 좌우로 1칸씩 늘린 듯 이 부분의 공포(栱包)는 가운데 공포와 다르게 장식이 과다하여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가운데 5칸은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꽂고 두공첨차를 받쳐올려 이출목째에서 행공첨차로 장여와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은 모두 길이가 제각기 다르다.

    특히 누각 아래의 기둥과 외진주는 바위 생김새에 따라 길이를 조절한 후 그렝이질을 해서 세웠다.

    누각의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이 누각에는 어제시와 1662(현종 3) 허목(許穆)이 쓴 죽서루기를 비롯하여 13점의 편액과 현액이 걸려 있다.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은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게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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