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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서루 선사 암각화와 용문바위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6. 2. 20:30

    죽서루 선사 암각화와 용문바위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보물 제213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1275(충렬왕 1)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403(태종 3)에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후 여러 차례의 수리로 인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정면 7,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원래 5칸이었던 것을 좌우로 1칸씩 늘린 듯 이 부분의 공포(栱包)는 가운데 공포와 다르게 장식이 과다하여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가운데 5칸은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꽂고 두공첨차를 받쳐올려 이출목째에서 행공첨차로 장여와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은 모두 길이가 제각기 다르다.

    특히 누각 아래의 기둥과 외진주는 바위 생김새에 따라 길이를 조절한 후 그렝이질을 해서 세웠다.

    누각의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이 누각에는 어제시와 1662(현종 3) 허목(許穆)이 쓴 죽서루기를 비롯하여 13점의 편액과 현액이 걸려 있다.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은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게시한 것이다.
















    용문바위와 성혈유적


    죽서루(竹西樓) 동쪽 옛 연근당 자리 가까이에 있는 바위문.

    행초서(行草書)로 용문(龍門)이라 새긴 음각글씨가 남아 있으며, 바위상부에 성혈유적이 있다.

    성혈(性穴)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선사시대의 상징물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민간신앙으로 정착되어 득남의 기원처로 변모하게 된다.

    , 칠월 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린 후

    좁쌀을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용문바위의 성혈은 크기가 직경 3~4cm 정도의 크기로 10개가 만들어져 있다 




    죽서루 선사 암각화와 용문바위


    용문바위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사후(死後)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 날 삼척의 오십천(五十川)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가는데 그곳이 용문바위이다.

    그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  

     

    죽서루 선사 암각화(竹西樓 先史 巖刻畵)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物像), 기호(記號), 성혈(性穴) 등을 그리거나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은 성혈 암각이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 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아 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었다.

    성혈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 다음 원형의 돌로 연마, 구멍을 넓혀서 만든다.

    죽서루 경내의 성혈은 죽서루 동쪽 용문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3cm 크기이며 모두 10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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