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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보물 제213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6. 3. 04:30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보물 제213호



    관동팔경(關東八景)의 제일루(第一樓), 죽서루(竹西樓)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1711(숙종 37)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썼다.




    죽서루(竹西樓)는 숙종 36년(1710)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쓴 글씨.




    제일계정(第一溪亭)1660~1662(현종 대)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쓴 것이다.


    제일계정(第一溪亭)이란 시냇가에 있는 정자 중 첫째'라는 뜻이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정자이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1837(헌3)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란 '바다의 신선이 노닐던 장소'라는 뜻이다.







    죽서루기(竹西樓記) - 송강 정철(松江 鄭澈)


    關東仙界陟州樓(관동선계척주루) 관동에서 경지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虛檻憑危夏亦秋(허함빙위하역추) 커다란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서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天上玉京隣北左(천상옥경인북좌) 하늘나라 서울 옥경은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어

    夢中銀潢聽西流(몽중은황청서류) 마음을 가다듬으니 은하수 서쪽으로 흘러가는 소리 들리네

    疎簾欲捲露華濕(소렴욕권로화습) 성긴 발 걷으려 하니 빛나는 이슬 축축하고

    一鳥不飛江色愁(일조불비강색수) 한 마리 새조차 날지 않으니 강가의 경치 수심 가득하구나

    欄下孤舟將入海(난하고주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 하는데

    釣竿應拂鬱陵鷗(조간응불울릉구) 낚싯대 울릉도 가는 갈매기 쫓아 휘두르네.











    오십천(五十川)


    오십천은 대표적인 감입곡류(嵌入曲流 : 산지나 고원 지대에서 깊은 골짜기 사이를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 하천) 하천으로

    길이 59.5, 유역면적 294이다.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병산(白屛山1,259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북서쪽으로 흐르며,

    미인폭포를 이루었다가 심포리에서 북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도계읍·신기면·미로면을 지난다.

    삼척시 마평동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오분동 고성산(古城山97m) 북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강의 명칭에 관한 유래는 하천의 곡류가 매우 심하고,

    삼척도호부에서 물의 근원지인 상류까지 가려면 물을 오십번 정도 건너야 한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연어의 회귀천으로 유명하다.




    보물 제213호 삼척 죽서루 표석




    죽서루(竹西樓)의 유래(由來)

     

    현재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절벽 위에 위치한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누각(樓閣이다.

    누각이란 일반적으로 기둥이 층 받침이되어 마루가 높이 된 중층(重層)의 다락집을 말한다.

    보통 누각의 1층 바닥은 자연상태 혹은 기단으로 남겨두고 그 상층에 우물마루 바닥이나 온돌바닥을 깔았다.

    이러한 누각은 그 기능상으로 볼 때 여러 종류로 분류 할 수 있으나,

    죽서루는 조선시대에 일종의 관아시설로 활용된 누각이었다고 하겠다.

    즉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客舍)였던 진주관(眞珠館)의 부속건물이었다.

    객사란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묵던 숙소를 말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죽서루는 공공시설로서 접대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물론 삼척 지방 양반 사대부와 삼척을 찾아오는 시인 묵객들의 정신 수양을 위한 휴식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죽서루는 건물 자체의 오래된 역사나 웅장함 뿐만 아니라 주위의 뛰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혀 사시사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서루(西樓) 혹은 죽루(竹樓)라고도 일컬어진 죽서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누각 동쪽에

    옛날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다.

    또 일설에는 죽죽선(竹竹仙)이라는 명기(名妓)의 집이 누각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죽서루라고 이름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고려 명종 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12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하다.

    또 고려말의 인물인 이승휴(李承休). 안성(安省). 김구용(金九容). 정추(鄭樞) 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읊은 것을 보면 죽서루는 고려말에도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서루는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허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허물어진 죽서루는 조선 태종3(1403) 당시 삼척 부사였던 김효손(金孝孫)에 의해 옛 터에 다시 건립되었다.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보물 제213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403(태종 3) 당시 삼척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고쳐지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어 있고, () 아래의 17개 기둥 중 아홉 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 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1662(현종 3) 부사 허목(許穆)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는 1711(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1837(현종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선생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37 (성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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