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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불교태고종 봉원사(韓國佛敎太古宗 奉元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9. 8. 21. 04:30

    한국불교태고종 봉원사(韓國佛敎太古宗 奉元寺)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이다.

    889(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절을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 공민왕 때에 보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396(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 반야암을 지어 불교탄압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하였고,

    1651(효종 2)에 다시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휴암(休巖도암(道庵) 등이 중건하였다.

    , 선조·인조·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조정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특히, 1748(영조 24)에는 왕이 절을 지을 부지를 하사하여 찬즙(贊汁증암(增巖) 등이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이듬해 영조는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렸으므로 이때부터 절 이름을 봉원사라 하였다.

    1788(정조 12)에는 팔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를 설치하여 승려의 승풍(僧風)을 지도, 단속하게 하였다.

    1884(고종 21)에는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이

    이동인(李東仁)의 지도 아래 개화파의 젊은이들을 깨우쳐 정변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신축하였으며, 1911년에는 다시 이보담(李寶潭)이 크게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때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최영월(崔映月)이 복원한 것이 많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위시하여 범종각·명부전·납골당·산신각·칠성각·종무소·비각 등이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鄭道傳)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金正喜)의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이완용(李完用)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등과 장승업(張承業)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67·69·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약 500년의 괴목이 있고,

    절 뒤에는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이 얽힌 관음바위가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원동)  





    대웅전(大雄殿)


    내부 공간구성에 있어서는 내부 고주없이 중앙불단을 뒤로 후퇴하여 설치함으로서 예불공간을 크게 확보하였다.

    즉 고대의 탑()중심의 의식에서 불상(佛像)의 등장으로 인한 법당중심의 가람(伽藍)이 구성되어

    근세(近世)에서는 법당내부에서 불상(佛像)에 직접적인 의식과 예불이 많아졌다.

    깊이가 깊은 예불공간의 구성(構成)은 의식(儀式)의 원활성과 많은 불자(佛子)들이 들어올 수 있는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은 내부공간이 예불중심의 공간으로 전환된 조선말(朝鮮末)후기의 사찰(寺刹)의 특징을 대변하는데

    봉원사(奉元寺)대웅전 내부구조(構造)가 좋은 실례(實例)이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24(1748)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이건(移建)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보이고 외9포 내11포 위에 55포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대웅전에는 영조대와의 하사품인 "대웅전" 현판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1~ 1993년 도화주로 김혜경 스님과 대중스님들의 원력으로 재건하였다.

    법당안의 보물급 탱화들은 그때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탱화와 단청은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고

    법당안의 범종(梵鐘)은 충남 덕산 가야사에 있던 종인데 조선시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수행하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때 타지 않고 있던 종을 옮긴 것이다.

    대웅전 건물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極樂殿)


    주불로는 아미타불 협시불로는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비교적 화려한 단청이며 전면 문살대 위에는 대나무, 국화, 연꽃 및 각종 화초를 덧붙여 화려함을 장식했다.





    칠성각(七星閣)


    주불로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내부에 조성되어 있는 탱화들도 대단히 좋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운수각(雲水閣)


    운수각은 조실스님의 거처로서 사용되는 곳으로 팔직지붕의 정면 3, 측면 1칸의 벽체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오른편으로는 영안각(靈安閣)이 자리잡고 있다  






    삼천불전(三千佛殿)

     


    1945년 화주 김기월 스님과 화주 김운파 스님의 연력과 전 사부대중이 원력을 합하여

    46() 대규모의 광복기념관으로 건립한 바 있으나 불행히도 19509256.25사변중 한강 도하작전대 소실되었다.

    이때 영조의 친필 "봉원사" 친필을 비롯한 "이동인, 김옥균"의 유물 등 중요 문적(文籍)이 소실되었다.

    1986년 주지 조일봉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건물허가 및 준비 과정을 거쳐 1988년 삼천불전의 복원불사가 시작되었고

    주지 김성월스님, 주지 김혜경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을 합하여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의 (210) 건물로 9년여만에 완성하였다.

    대들보 무게 7톤으로 알라스카산 수령 227년된 나무들을 사용하였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과 삼천불을 봉안하였다.












    한글학회 창립한 곳


    이곳 유서깊은 봉원사는 우리 말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 가 창립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학회 창립 100돌에 이 표지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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