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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부석사(浮石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9. 7. 30. 04:5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부석사(浮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공민왕 21)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부석사는 20186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山地僧院)'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7곳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부석사에서 벼락맞은 느티나무





    虛門洞天(허문동천) 三何(삼하)


    허문(虛門)’ 문짝이 없는  문이란 뜻이기에 아마 일주문을 지칭하는 듯하며

     ‘동천(洞天)’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세계이니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이란 뜻이 된다.

    삼하 선생이 썼다.





    부석사 일주문(浮石寺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산문(山門)이니 여기서부터는 절 안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서 일심(一心)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일주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온갖 번뇌와 망상, 혼란한 생각을 버리고 깨달음의 일념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석사 일주문 앞쪽에는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현판이 걸려있고,

    안쪽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의 현판은 효남 박병규(曉楠 朴秉圭, 1925~1994) 선생의 글씨이다.

    효남은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다.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부석사 당간지주(浮石寺 幢竿支柱) - 보물 제255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 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천왕문(浮石寺 天王門)


    천왕문(天王門)은 사찰 안으로 들어오는 악귀(惡鬼)를 제거하고 불법(佛法)을 옹호(擁護)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의 사왕천(四王天)을 주제하는데,

    동쪽 지국천(持國天), 남쪽 증장천(增長天), 서쪽 광목천(廣目天), 북쪽 다문천(多聞天)을 주제하는 왕이다.

    사천왕상은 소조(塑造), 석조(石造), 목조(木造) 등으로 조성하는데 각각 발아래 잡귀를 밟고 서있는 입상(立像)이다.

    사천왕이 들고 있는 기물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琵琶), 남방 증장천왕은 큰칼(大刀),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如意珠),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부석사의 석축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호국의 기원으로 서라벌을 향한 것이라는 설이 재미있다.

    부석사에 한 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 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


    이 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에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높이는 동탑이 3.6m, 서탑은 3.77m이며,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두 탑의 양식이 같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맨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정면 3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응향각(凝香閣)


    취현암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사체인데 원래 강원 건물이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있었는데 통로와 너무 인접하여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서 신축하였다.

    정면 5, 측면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최근에는 전면에 마루를 덧달았다.



    장경각(藏經閣)

    고려시대 화엄경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부석사(浮石寺)의 유래, 浮石(부석)

    신라 문무왕 1(661)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화엄학(華嚴學)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삼장(智嚴三藏, 602~668)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대사가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鳳凰山, 818m)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 불렀다고 한다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이중환(李重煥, 1691~1756) 택리지(擇里志)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있다.'라고 적고 있다.







    삼성각(三聖閣)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 (), ()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장대석으로 4단 쌓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는데 지붕은 팔작 형식이다.

    그리고 기단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공포는 익공 형식이지만 마치 다포 형식처럼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1구씩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다.

    현재 내부에는 불단 중앙칸에 미륵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탱화를 모셨다.

    왼쪽칸에는 산신도를, 오른쪽칸에는 독성을 모시고 독성 탱화를 걸었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태나 부재의 깎음 수법 등으로 보아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장식성에 치우쳐 법식이 흐트러져가는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부석사 안양루(浮石寺 安養樓)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安養門)’ 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어 있다.

    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수량수전(無量壽殿)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浮石寺 無量壽殿 石燈) - 국보 제17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팔각 석등(높이 2.97m)이다.

    맨 아래 네모난 바닥돌의 옆면에는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8개 조각하고 그 위에 각기 8개의 귀꽃 봉오리 장식을 하였다.

    그 위에 놓인 팔각기둥의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모양의 장식이 8개 새겨져 있다.

    불을 밝히는 화창 사이의 네 면에 새겨진 정교하고 세련된 보살상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석등 정상에 있던 장식은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 국보 제18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本堂)으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 7(1016)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7(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1376)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 3(1611)에는 폭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선묘각(善妙閣)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조사(義湘祖師)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善妙)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榮州 浮石寺 三層石塔) - 보물 제249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탑신 1층의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 두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들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 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 - 국보 제19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21(1490)과 선조 6(1573)에 다시 고쳤다.

    고려 신종 4년인 1201년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 바 있어 조사당이 세워진 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정면 3, 측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무량수전과 같이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안쪽 벽에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그리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떼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원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벽화이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 있는 벽화는 새로 그린 것이다.






    부석사 자인당(浮石寺 慈忍堂)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했다.

    정면 3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공포(栱包)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삼존여래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이다.




    부석사 응진전(浮石寺 應眞殿)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정면 3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정면 3,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주심포 건물이다.

    창호는 정자살창을 짜 각 4짝 분합문을 달고 옆면에는 1분합문을 달아 출입을 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로 설치하였다. 지장삼존불과 지장후불탱을 모시고 있다.










    부석사 가람의 입지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놓일 자리에 따라 건물의 조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국()이 넓은 땅에서는 건물을 비교적 넓게 배치하되 높은 건물을 정점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이 좁고 가파른 땅에서는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하였다.

    부석사의 경우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 중턱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국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

    왕명(王命)으로 창건(創建)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道理)로 국론(國論)을 통일(統一)하여 내외(內外)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로 불리우게 됨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웠다.

    1916년 해체 보수 시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高麗) 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 등이 크게 중창되었으나

    공민왕(恭愍王) 7(1358) 외적의 병화(兵火)를 당하였고, 그 후로 우왕(禑王) 2(1376)에 무량수전이 재건되었고,

    우왕 3(1377)에는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대석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제18), 조사당(국보 제19),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조사당 벽화(국보 제46), 고려목판(보물 제735),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塑造佛像)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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