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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사적 제193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1. 19. 04:30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사적 제193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실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1408(태종 8)에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건원릉을 이곳에 조성하였고,

    이후 조선 역대의 여러 왕과 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왕릉은 모두 9기에 이르게 되었다.


    동구릉의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왕릉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 불렸다가,

    수릉이 마지막으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으로 굳혀졌다.

    동구릉에는 다양한 형식으로 조성한 능이 있어 재미를 더한다.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왕과 왕후의 능 2기를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을 1기씩 각각 조성한 동원이강릉,

    왕과 왕후를 하나의 능에 조성한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 3기를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이 그 것이다


    건원릉(健元陵) : 1대 태조(太祖)의 능 - 단릉(單陵)

    현릉(顯陵) : 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목릉(穆陵) : 14대 선조(宣祖)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변형

    휘릉(徽陵) : 인조(16)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 단릉(單陵)

    숭릉(崇陵) : 18대 현종(顯宗)과 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 - 쌍릉(雙陵)

    혜릉(惠陵) : 경종(20)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 - 단릉(單陵)

    원릉(元陵) : 21대 영조(英祖)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 - 쌍릉(雙陵)

    수릉(綏陵) :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 - 합장릉(合葬陵)

    경릉(景陵) : 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와 첫 번째 황후 효현성황후 김씨, 두 번째 황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 - 삼연릉(三連陵)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동구릉 홍살문(東九陵 紅箭門)


    홍살문이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에는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동구릉 재실(東九陵 齋室)


    재실은 평상시 영(, 5) 또는 참봉(參奉, 9)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주요 시설은 집무실인 재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安香廳),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행랑채(행랑청) 등이 있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의 능으로 1408(태종 8)에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잘 정비된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양식을 따랐으며

    이후 조선 왕릉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들과는 달리 봉분에 갈대를 입혔는데, 이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을 그리워하며

    그곳의 갈대로 자신의 봉분에 덮어 달라고 한 태조 이 성계의 유언을 태종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원릉에는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와 서울의 내곡동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은 헌릉의 태종 신도비뿐이다.

    건원릉의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등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서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南宋)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관련된 일화

     이자춘{추존 환조}과 부인 최씨{추존 의혜왕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

    국호(國號) 변경, 한양(漢陽) 천도(遷都) 등 새로운 왕조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의 암투(暗鬪)로 인한 자식들의 분란을 당하자 차남 방과{定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된다.

    그 후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으로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자식은 모두 85녀를 남기고 창덕궁에서 승하{태종 8}한.

    건원릉에는 다른 왕릉과 다르게 봉분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이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명하듯이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는

    이성계에게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풀로 일종의 의복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위화도회군}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이었지만

    말년의 생활이 자식들의 피를 보는 불우한 일생을 마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현릉(顯陵)


    현릉은 세종의 맏아들인 조선 제5대 문종(1414 ~ 1452)과 왕비 현덕왕후(1418 ~ 1441) 권씨의 능으로

    문종릉은 1452(단종 즉위)에 조영되었고 왕비의 능은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문종은 몸이 허약해 왕위에 오른지 24개월 만인 39세로 병사하였 는데,

    예기치 않은 문종의 죽음은 단종과 세조로 이어지는 조선사의 또 하나의 피의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산후조리가 안 좋아 1441(세종23)별세하여 안산 소릉(昭陵)에 묻혔는데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로 추봉 되었다.

    하지만 왕비의 친정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일족이 극형을 받자 죽은 왕비도 서인(庶人)으로 격하되었으며

    안산 에 있던 왕비의 능도 파헤쳐져 물가에 옯겨졌는데,

    이후 1513(중종8)에 가서야 왕비가 복위되어 현재의 위치로 능이 옮겨 오게 되었다.

    현릉은 건원릉의 동쪽에 있는데 홍살문과 정자각, 비각 등의 부속시설은 하나만 만들고

    정자각 뒤에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 의 분봉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조선 초에 제정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이다.


    관련된 일화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20여년간의 세자(世子) 생활로 정치력은 우수했으나

    평소 몸이 허약했기에 재위 24개월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에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계유정란(癸酉靖亂 :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치하고 군부를 장악함)"

    세조의 찬위(簒位), 사육신(死六臣) 사건 등을 초래하게 된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문종 대는 병법서(兵法書)<동국병감(東國兵鑑)> 등을 간행하고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는 등의

    작업과 함께 서울의 도성(都城)을 비롯한 각 도의 주요 읍성(邑城)들을 개축(改築)하는 등의 치적을 올린다.

    생전과 사후 모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단명(短命)한 비운의 왕비 소현왕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안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단종과 경혜공주를 두었지만,

    세자빈 책봉 4년만에 승하해 현덕(顯德)의 시호(諡號)를 내렸고 문종 즉위 후 왕후에 추숭(追崇)된






    목릉(穆陵)


    목릉은 조선 제14대 선조(1552 ~ 1608)와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 ~ 1500), 계비 인목왕후 김씨(1584 ~ 1632)의 능으로

    세 능이 한 능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왕과 계비의 능은 정자각 북편에 동원이강식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왕비의 능은 정자각 동편의 언덕에 치우쳐 있어 전체적인 배치 능역은 같으나

    줄기와 형태가 전혀 다른 동역이강(同域異岡)식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조영시기는 왕비의 능이 1600(선조33), 계비의 능이 1632(인조10)인데

    왕의 능은 1608년 현재의 경릉 자리에 모셨다가 1630(인조 8)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목릉의 조영은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설물들의 조형 기법은 그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능을 조영할 장인을 구하기가 힘들었던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의인왕후릉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처음으로 새겨진 꽃무늬는

    이후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관련된 일화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 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으나,

    조선 최대의 전란(戰亂)7년간의 임진(壬辰). 정유(丁酉) 왜란(倭亂)을 겪고 국토가 유린(蹂躪)되고 문화재(文化財)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어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한 선조대(宣祖代)는 조선 중기의 정치 개념을 대변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된 시기이다.

    (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패배주의적 민족성(民族性)을 날조한 당파싸움으로 잘못 평가되어온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등으로 붕당이 나뉘지만,

    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을 겪은 후에 재야(在野)에서 서원(書院) 건립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정치의 구심(求心)을 잡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이 혼합된 형태의 정치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이는 결국 정치의 기반이 지방 중소지주층(中小地主層)까지 확대된 형태이기에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해 나간

    오히려 일당(一黨)의 독재(獨裁)가 아닌 붕당(朋黨)의 민주적인(?) 정치형태로의 진보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의인왕후 약사(略史)

    1555[명종 10]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난 의인왕후는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선조 33)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다.


    인목왕후 약사(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선조 17)에 태어났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인조 10)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휘릉(徽陵)


    휘릉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1624 ~ 1688)의 능으로

    1688(숙종14)에 조영되었으며 건원릉의 서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장렬왕후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으나,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실생활을 보냈으며 후사 없이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휘릉은 숭릉보다 4년 후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영기법은 대체로 숭릉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능의 배치는 질서가 잘 잡혀 있고 자취가 정연한 편이다.

    무인석은 눈, , 입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석물들은 전체적으로 얕고 오밀조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약사(略史)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 2(1624)에 태어난 장렬왕후(莊烈王后)는 15살의 나이{1638, 인조 16}

    인조의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용성대군(龍成大君)을 낳은 후 승하하자 계비(繼妃)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1659}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74, 현종15}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한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숭릉(崇陵)


    숭릉은 조선 제18대 현종(1641 ~ 1674)과 왕비 명성왕후 김씨(1642 ~ 1683)의 능으로 1674(현종15)조영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병자호란 후 아버지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심양에서 태어났다.

    이후 효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18대 왕으로 즉위하여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천문관측과 역법연구에 이바지하는 등 민생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효종은 재위하던 15년 내내 예론의 논쟁에 시달려야 했으며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숭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의 형태는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봉분 둘레에는 병풍 석이 없다.

    석물의 조형 양식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능들은 정자각 의 지붕이 맞배지붕 양식을 취하는데 반해 숭릉의 정자각은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정자각은 보통 정면 3, 측면 2간으로 만들어졌는데 숭릉의 정자각에는 익랑(翼廊)이 붙어 규모가 커졌다.

    이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인 17세기 말 숙종 때 유행하던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된 이야기

     이역(異域) 땅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아들로 태어난 현종(顯宗)

    귀국{1645} 후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고,

    1659년에 효종을 이어 조선조 18대 왕위에 등극(登極)하게 된다.

    그로 인해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유업(遺業)인 북벌(北伐) 계획을 성취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대명숭향(大明崇向)의 경향만 현저하게 되었고, 3

    4{1674}의 젊은 나이에 15년의 왕위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국내 정세에서도 즉위 초부터 조대비(趙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인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2차에 걸친 당쟁(黨爭)의 결과 많은 유신(儒臣)들을 희생시키게 된다.

    재위 기간의 내치(內治)로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고, 1668년에 동철(銅鐵)활자 10만여자를 주조했으며,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현종의 뒤를 이었던 숙종대(肅宗代)에 편찬된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南人) 집권기의 1차 실록을

    1683년 서인(西人) 집권기 때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다시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불안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태어나

    1651{효종 2}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온다.

    슬하에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公主; 명선(明善), 명혜(明惠), 명안(明安))을 두었는데,

    42{1683년 숙종 9)의 나이에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혜릉(惠陵)


    혜릉은 조선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1686 ~ 1718)의 능으로 1718(숙종44)조영되었다.

    단의왕후는 1696(숙종 22)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경조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 후사 없이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경종이 즉 위한 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제는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明陵)의 제도를 따랐으나 능역은 매우 초라하다.

    석물의 규모는 동구릉 의 석물 중 가장 왜소한데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옛 형식을 따른 점이 특이하다.

    한국전쟁 때 불타 주춧돌만 남아 있던 홍살문 과 정자각은 199512월에 복원되었다.

    한편, 조선의 왕릉들은 대부분 북쪽에 머리를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북침(北枕)을 하 고 있는데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했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 약사(略史)

    1686{숙종 12} 청송(靑松) 심씨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태어난 단의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33세의 나이{숙종 44}로 슬하에 소생없이 생을 마감한다.

    경종 즉위 후 왕후에 추봉(追封)되고 1726{영조 2}에 휘호(徽號) 공효정목(恭孝定穆)을 추상(追上)했다 






    원릉(元陵)


    원릉은 조선 제21대 영조(1694 ~ 1776)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 ~ 1805)의 능으로

    왕의 능은 1776(영조52)에 조영되고, 계비의 능은 1805(순조5)에 조영되었다.

    숙종의 넷째 아들이자 경종의 동생인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52년간 왕위에 있었던 최장수 왕이었다.

    영조는 세자때부터 붕당정치에 휘말려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탕평정국으로 이끌어 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끌었던 영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붕당정치의 폐해로 자신의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끝내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고 만다.

    정순왕후는 15살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비가 되었으며,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며 국 정을 이끌기도 하였다.

    원릉은 왕의 능과 계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하는 쌍릉으로 조영되었으며,

    상설제도는 영조 때에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을 따르고 있다.

    원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감싸안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입체감은 약간 떨어진다.


    관련된 이야기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하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된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된다.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영조 21}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영조 35}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린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순조 5}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경릉(景陵)


    경릉은 조선 제24대 헌종(1827 ~ 1849)과 왕비 효현왕후 김씨(1828 ~ 1843), 계비 효정왕후 홍씨(1831 ~ 1904)의 능이다.

    원래는 목릉의 자리로 3기의 능이 나란히 자리잡은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왕릉 중에서는 유일한 삼연릉이다.

    정면에서 볼 때 가장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왕비 효현왕후, 그 오른쪽이 계비 효정왕후의 능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요절한 추존왕 익종의 아들로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 을 받았으며, 후사없이 23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시달렸다.

    왕비 효현왕후 김씨는 16세의 나이로 요 절하였으며, 계비 효정왕후 홍씨는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경릉의 상설제도는 영조때 제정된 국조상례보편을 따르고 있는데,

    세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하였으며 각 능 앞에 상석만 따로 마련했을 뿐 모든 제도를 단릉과 마찬가지로 조영하였다.

    또한 능 앞의 3단이 2단으로 생략되어 장명 등과 문인석, 무인석이 같은 단에 마련되어 있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련된 이야기

    23대 순조(純祖)의 아들인 세명세자(世明世子:[추존 익종])의 아들로 태어난 헌종(憲宗)

    세명세자가 요절(夭折)하자 조부(祖父)인 순조의 대를 이어 1834년에 조선조 24대 왕위에 올라

    15년간의 재위(在位) 시절을 마치고 슬하(膝下)에 자식없이 1849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昇遐)한.

    헌종대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의 내적 모순(矛盾)이 가중되고 외세(外勢)의 힘이 뻗쳐오기 시작한 때이다.

    국내의 정치 권력은 순조대부터 확고한 권력을 점유한 세도정권(勢道政權)이 점차 가속화된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7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함으로 인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가 지속되는데,

    한 때 헌종의 외척(外戚)이었던 풍양 조씨(豊陽趙氏)인 외조부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문중(門中)

    권력의 틈새로 들어와 두 문중의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헌종의 비()로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책봉되면서 다시 안동 김시의 세도 권력이 독점을 하고

    그들의 주도로 철종(哲宗)의 왕위 계승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권력의 정체(停滯)는 그 산물(産物)로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紊亂)을 가속화시키고,

    그로 인해 전국적인 민란(民亂)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또한 통치 체제에 위협을 느끼게 했던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탄압은 그 정도를 더해

    "기해사옥(己亥邪獄)""김대건(金大建) 신부 처형" 등으로 대처하는 등 국가의 내적 모순을 축적(蓄積)하게 된 것이다.

    헌종대의 외세(外勢)에 접근은 조선의 문호(門戶)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는데,

    조선의 권력층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쇄국(鎖國)의 길을 걷게 되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효현왕후 김씨 약사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태어나[순조 28],

    1837[헌종 3]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고, 1841년에 가례(嘉禮)를 올려 왕후(王后)가 되었으나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슬하에 후사(後嗣)없이 승하한다.[헌종 9]


    효정왕후 홍씨 약사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는 본관(本貫)이 남양(南陽)인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태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 승하 후,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5년 뒤에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대(哲宗代)를 이어

    고종대(高宗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면서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고종 41[1904]에 역시 슬하에 소생(所生)없이 승하합니다.






    수릉(綏陵)


    수릉은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효명세자)였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추존왕 익종(1809 ~ 1830)과 그의 비 신정 왕후 조씨(1808 ~ 1890)의 능이다.

    익종은 4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9세 때부터는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불행하게도 4년만에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후 익종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아버지를 추존하여 익종이라 했고, 1899(광무 3)에 고종이 다시 문조익황제 로 추존하였다.

    신정왕후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대왕대비로 있던 1863(철종 14) 철종이 승하하자

    왕위 결정권을 갖고 고종을 왕이 되게 한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능은 단릉처럼 봉분도 하나고 상석도 한나만 마련해 놓았다.

    능제는 대부분 국조상례보편을 따르고 있으나 문인석이 복 두 대신 금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색다르다.

    그리고 능 앞의 3단 중 가운데단과 아랫단이 하나로 합해져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단에 서 있다.

    봉분 주위 석물의 규모는 왜소하고 섬약하지만 무늬의 장식은 세밀한 편이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明世子 - 翼宗[文祖]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익종(翼宗)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의 슬하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4세 때[순조 12]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효명(孝明)의 시호(諡號)를 받고

    1827[순조 27]에 왕명(王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데,

    민정(民政)에 힘써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고 형벌(刑罰)을 삼가는 등

    적극적인 왕권(王權)의 강화에 힘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하고 만니다.

    국 다시 세도정권(勢道政權)의 힘이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풍양조씨(豊壤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郡)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난[순조 8] 신정왕후(神貞王后趙氏)

    순조 19[1819]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슬하에 헌종(憲宗)을 낳는다.

    신정왕후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냈지만,

    그 보다는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마친 일생이 더욱 화려하다 할 것이다.

    곧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1857, 철종 8]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이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의 후계자 결정에 권한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인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한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조선 태조 고황제 시비(朝鮮 太祖 高皇帝 詩碑)


    登白雲峯(등백운봉) 백운봉에 올라서


    引手攀蘿上碧峯(인수반라상벽봉) 손 당겨 댕댕이 덩굴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一庵高臥白雲中(일암고와백운중)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토) 만약에 장차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조선왕릉 세계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2009927(한국시각) 스페인 세비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33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받은

    조선 왕릉 42기의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에 등재되었다.





    동구릉 능역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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