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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암서원 확연루(筆巖書院 廓然樓) -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7. 13. 19:53

    필암서원 확연루(筆巖書院 廓然樓) -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供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글씨다.

    규모 : 2층 18칸 13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 ~ 1560)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의릉참봉 김령(金齡)의 아들로 장성 맥동 출생이다.
    10세 때 호남관찰사로 내려왔던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다고 하며

    이어 송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8세인 1527년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이 무렵 사서·오경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까지 섭렵하였으며

    천문지리, 음양산수(陰陽算數), 율려척도(律呂尺度)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3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이황과 교유하였다.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이듬해 김안국의 천거로 호당에서 사가독서하였다.

    1543년 홍문관박사 및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며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으며

    이어 홍문관 부수찬에 올라 기묘사화 피화자의 신원을 청하기도 하였다.
    1545년 인종이 죽자 사직하고 귀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1556년 서경덕의 학문이 하학(下學)을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로 이끌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1557년 「주역관상도(周易觀象圖)」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여

    성리설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

    1558년 퇴계 이황과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해 토론하던 고봉 기대승이 와서 의견을 구하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보는 이항의 설에 반대하는 기대승의 입장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나정암(羅整庵)의 견해에 따르는 노수신(盧守愼)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비판하는 글을 써

    뒤에 이황과 기대승이 노수신의 설을 반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이론화 과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소학과 효경을 학문의 시작으로 강조하였으며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주자가례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예서인 가례고오(家禮考誤)를 저술하였다.

    문인으로는 정철, 기효간, 변성온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등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과 곡성 영귀서원(詠歸書院)에 배향, 1796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면앙정삼십영」(1552년), 「소쇄원사삽팔영」을 지었다. 양자징(소쇄옹 양산보 아들),

    유경렴(미암 유희춘 아들), 일재 이항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고 조희문의 장인이다.

    문집으로 『하서집(河西集)』이 전한다.

     

    전라남도 장성군 필암서원로 184 (필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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