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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궁(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20. 7. 15. 22:29

    신풍루(新豐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1790년(정조 14) 창건, * 2002년 복원

     

     

    우화관(于華館) 발굴 복원현장

    화성행궁의 우화관 복원은 2004년 시작된 ‘화성행궁 2단계 복원사업’의 하나다.

    2단계 복원사업 대상은 우화관·별주·장춘각이다.

    우화관은 1789년(정조 13년)에 건립된 화성유수부의 객사(客舍)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셨던 문화유산이다.

    외국 사신·관리들의 숙소·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화관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가 건립되면서 철거됐다.

    수원시는 2016년 화성성역의궤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도를 바탕으로

    우화관 발굴조사와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별주(別廚) 발굴 복원 현장

    화성행궁의 별주는 1795년 정조대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에 특별히 올릴 음식 준비를 위해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회갑잔치 이듬해부터는 현륭원 행차를 위해 정조가 화성행궁에 머물 때

    대접할 음식 예법을 기록한 문서를 별주에 보관했다.
    정조 승하 후 분봉상시(分奉常寺)로 이름이 바뀐 별주는

    현륭원과 건릉, 화령전에 올릴 제물을 마련하고, 문서를 정리 보관하는 곳으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화성행궁(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힌다.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경기도립병원)과

    경찰서(수원경찰서) 등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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