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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미읍성 회화나무와 옥사(獄舍, 牢房)
    자연과 함께/나무(木) 2021. 5. 17. 19:32

    해미읍성 회화나무와 옥사(獄舍, 牢房)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읍내리)

     

    殉敎紀念碑(순교기념비)

     

    해미읍성 천주교 순교기념비

     

    여기 해미성은 조선 태종 18년 덕산의 병마절도사를 옮긴 후 축조한 석성이다.

    효종 2년(1651) 호서좌영을 설치, 군영이 되면서

    호서 내포지방의 국사범들이 이곳으로 송치되어 오던 중,

    정조 15년 (1791년) 10월 사헌부의 계언에 의하면 서산군의 양반들이 천주학을 전수하여

    윤리에 위반되는 언행이 다분하니 읍졸로 하여금 엄중히 다스리어 서학의 뿌리를 뽑게하라 하여

    호서지방 신자들이 이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

    배교하라는 우뢰같은 호령에도 평화로운 모습들, 육신은 찢기어도 옥같은 영혼이라,

    믿음이 천심에 이르렀는데 꺽일수 있을손가. 주리틀고 돌로 치고 목을 베며,

    서문밖 돌다리위에 사지를 들어 메치니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부수어져

    청혈이 흘러 바다 어귀 십리에 이르렀다.

    병인박해(1866)에서 무진박해(1868)동안만도 박요한, 문마리아, 방마리아를 비롯하여

    천여명이 순교했고, 1791년에서 1882년까지 복자 김대건의 증조부 김비오를 비롯하여

    박 라우렌시오, 인 말딩(마르티노)등 수천명에 이르니 어찌 필설로 일일이 밝힐 수 있으랴.

    당시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한 박승익, 이주필 등 십 여명의 증언으로 이 순교지를 찾고

    이규남, 백요한 신부의 주선으로 서산성당에서 1975년에 순교탑을 세웠으며

    서문밖 순교 돌다리는 신규식 신부의 주선으로 서산 성당에 옮겨 보관하다가 이곳에 복원했다.

    순례자들아!

    지금은 말없는 돌이나, 순교자들의 피끓는 소리가 들리며 영원한 생명의 숨소리가 들린다.

    이 땅은 죽음으로만 가슴에 하늘의 길 기르킨 거룩한 땅이며

    피로써 빚은 믿음 도로 찾은 이 땅 위에 돌을 깍고 순교자들의 마음을 새기는 뜻은

    같은 하늘과 땅이언만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음이 이 피거름에 연유함을

    영원이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작은 돌을 다듬어 세우다.

     

    1982년 8월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황민성 짓고

    늘빛 심응섭 쓰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瑞山 海美邑城 槐木) -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내 위치하는 회화나무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수령 약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관련이 있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고문을 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안내문 내용)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 되고 있음

     

     

    해미읍성 옥사(海美邑城 獄舍)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이 옥사는 1935년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海美 殉敎者 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97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金震厚, 1738~1814)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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