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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해 지은 절, 흥천사(興天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1. 6. 1. 04:03

    흥천사(興天寺)

    조선 제1대 태조비 신덕왕후 원찰(願刹)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왕이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지를 정릉(貞陵)에 조영(造營)하고,

    왕비(王妃)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大伽藍)이 완성되었다.

     

     

    6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 삼각산 흥천사(三角山 興天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일년뒤 1398년에는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대규모의 사리전을 세웠다.

    조선초기의 고승이신 신미대사(1403-1480)가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한글창제를 도왔던 도량도 흥천사였다.

    흥천사는 도성안에 있었던 대찰로서 1424년(세종 6년)에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되었는데 현재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이었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청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 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고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1510년(중종 5년)에는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년)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흥천사에 전해지고 있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지치고 힘든 이들의 휴식처이자 치유처인 삼각선원을 지었다.

    2015년 저소득 맞벌이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인 흥천어린이집을 건립, 개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2동)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

     

     

     

    코로나19 확산으로 마스크 미착용자는 흥천사 경내 출입을 금합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흥천사 대방(興天寺 大房) - 등록문화재 제583호

     

    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시주하고 모연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직접 현판까지 적었던 전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도에는 본전인 법당 정면에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천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누각 대신 대방(大房, 큰방)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인 능찰(陵刹)에서 보이는 가람배치이다.

    대방은 H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였으며, 전면은 겹처마의 2익공(翼工)집이고,

    측면과 후면은 민도리집으로 구성하였으며, 전면양끝에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부 가운데는 대방 8칸이 있고,

    그 앞뒤에 퇴칸이 놓여 마루를 구성하며, 대방의 좌측에 4칸 크기의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작은 방과 헛간이 달려 있다.

    따라서 누각과 방사와 법당과 숙소 및 부엌의 기능까지 합친

    종합적인 다용도의 공간으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의 건립 시기는 사중에 보관 중인 현판 기문(京畿右道楊州牧地三角山興天寺寮舍重創記文)을

    근거로 고종 2년(1865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사대문 세 사찰

     

    절은 이름만으로 내력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흥(興)’ 이나 ‘봉(奉)’이 들어간 사찰은 대부분 왕실과 관련이 있다.

    조선 초 사대문 안에 있었던 세 개의 사찰 이름은 모두 흥(興) 자를 첫 글자로 사용했다.

    물론 나중에 원각사가 된 흥복사(興福寺)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이었지만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사대문 안에 지어진 흥천사(興天寺)는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능 옆에 세워진 능침사(陵寢寺)였고, 지금의 혜화동 자락에 있던

    흥덕사(興德寺)는 태조 이성계가 태상왕이 된 뒤 자신의 사가를 사찰로 만든 경우다.

    태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세조에 의해 중창되었던 조선 초 사대문 안 3대 사찰은

    때로는 호불(세종, 세조) 왕들에 의해 때로는 선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이유(문종, 예종, 성종)로 번창하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 세 사찰 모두 사달이 나고 만다. 1년 사이 화재로 모두 소실된 것이다.

    화재 당시에는 특이한 기록이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종실록〉에 사실 고백이 있다.

    흥천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리각에 화재가 발생하자 이전 유생들의 행패가 드러난 것이다.

    흥천사 사리각 방화 조사결과 유생이 불을 지른 것이 밝혀지자 중종이 이들의 강력한 처벌을 지시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발 벗고 나서 유생들의 구명에 나선다.

    이때 중종이 ‘폐조(연산군) 때 흥천사와 원각사에 불을 지르더니 이제 또 반복되었다.

    처벌을 면해 줄 수 없다’며 강력한 처벌을 지시한 것이다.

    여하튼 조선의 3대 사찰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원각사는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흥청으로 변했고, 흥복사는 조선 중기 이후

    세도가(송시열 등)의 사저로, 흥천사는 월산대군 일가의 집터 자리로 변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 www.hyunbulnews.com/

     

     

     

     

    종각(鐘閣)

     

    조석예불이나 각종행사 때 울리는 범종을 메달아 놓은 집

     

     

    흥천사 극락보전(興天寺 極樂寶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6호

     

    극락보전은 1853년(철종 4)에 세워진 것으로,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흥천사의 주불전이다.

    태조는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지어 원찰(願刹)로 삼았다.

    하지만 1409년(태종 9)에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없어졌다.

    1669년(현종 10)에 정릉을 수리하고 근처 암자를 옮겨 신흥사(新興寺)라고 했으나,

    1794년(정조 18) 현재 터에 다시 지은 뒤에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극락보전은 다포로 공포를 짠 팔작지붕집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판벽에는 불교 고사를 가득 그렸는데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가 눈에 띈다.

    꽃살문과 기둥 위에 장식한 용머리 조각은

    조선 말기 건축에 나타나는 장식의 경향과 구조적 특성을 보여 준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 사찰에서는 대장(大房)이란 건물을 짓는 경향이 등장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흥천사 대웅전 앞에도 대방이 있다.

     

     

    노전(爐殿)

     

    법당근처에 지어서 조석으로 기도하는 스님들이 살도록 하는 집

     

     

    용화전(龍華殿)

     

    장차 용화세계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시게 될 미래의 부처님이신 미륵불을 모신 법당

     

     

    흥천사 명부전(興天寺 冥府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7호

     

    흥천사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1855년(철종 6)에 순기(舜猉) 스님이 세웠으며, 1894(고종 31)에 중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좌우에 풍판을 달았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 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살미첨차가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조각하였다.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모양 있게 장식하였고,

    안으로 용꼬리를 새겨 놓아 건물의 격을 높이고 있다.

    건물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도명존자·시왕·판관·인왕상 등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뒷면 벽에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와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은 안락한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부처를 가까이 모시는 협시보살이기도 하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장엄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성각(獨聖閣)

     

    홀로 선정을 닦아서 도를 깨달으신 나반존자(那畔尊者)상과 독성탱화(獨聖幀畫)를 모신 법당.

    나반존자님은 미륵부처님이 출세하시기전 말법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분이다.

     

     

    북극전(北極殿)

     

    치성광여래·일광여래·월광여래가 삼존불이 되어 중심을 이루고,

    삼존불 좌우에 칠여래와 칠원성군이 그려진 칠성탱화가 모셔져있다.

    오른쪽에는 삼각산의 산신탱화가 모셔져있어서 산신각도 겸하고 있는 법당이다.

     

     

    삼각선원(三角禪院)

     

    스님이나 신도들이 조실스님의 지도로 참선수행을 하는 집

     

     

    깨닫고자 하면 - 원감충지(圓鑑沖止)

     

    깨닫고자 하면 점점 멀어지고
    평안하려 하면 오히려 불안해지네
    평안을 잊어야 평안하고
    깨달음을 잊어야 깨닫게 되니
    이 도리는 원래 복잡하지 않네.

     

     

     

    귀가 커지는 산방 – 김금용

     

    가야산 계곡 암자에 가방을 내려놓자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진다.

     

    새벽에 일어나 수도승 흉내를 내본다

    시집 한 권을 독파한다

     

    축하 답신을 보내려던 편지지 한 쪽을 찢어

    집게벌레를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내모신다

     

    절마당 샘물터에 잠겨있던 잔별 몇 개

    너도 불경 말씀 잘 알아들었냐

    반짝 흰 이 드러내며 웃는다

     

     

    판소리 - 고영섭

     

    ​우리들의 노래를 어찌할까나

    겨우 칠일 동안 노래하기 위해서

    칠 년 동안 땅속에서 인고를 견딘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하는데

    온몸을 울리며 소리를 뽑는

    저 상가수 임방울의 쑥대머리처럼

    간간하고 절절한 소리 뽑아야

    우리 모두 판 울리며 하나 되겠지

    아, 피 토하는 소리꾼의 몸 떨림으로

    우주계의 고막이 뻥 터지는 소리.

     

     

    봄에는 꽃 피고 – 작자 미상

     

    봄에는 꽃 피고 가을에는 달이요

    여름에는 맑은 바람 겨울에는 눈이 있네

    그대 마음 이와 같이 넉넉하다면

    이야말로 인간 세상 좋은 시절이네.

     

     

    복숭아 성전 – 석연경

     

    불 들어갑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불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제 것 아니라고

    봄날을 활활 탄다

    비우다 투명하게 사라진

    분홍 분홍 복숭아꽃잎

    바람의 머릿결이

    불의 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아무것도 아닌 풍경의 절벽

    생의 바깥이란 없어서

    안개비 자욱한 저녁

    시간의 숨소리 따라

    설레는 복숭아나무가

    불꽃의 심장을 식히고 있었다.

    분홍 분홍 볼이 발갛다

    다시 봄이다

    봄의 새악시다

     

     

    연꽃 - 이진해

     

    연꽃이 피었다

    바람에 떨어진 쉼표는 덧니처럼

    꽃대에 올라앉았다

    온 몸이 녹아 내렸다

    이별의 끝이다

    쉼표에 따라온 말 한마디

    연잎처럼 푸르다

    돌아가야 할 약속들이

    쉼표같은 검은 씨앗이 된다

    샤워꼭지를 달았다

    소리처럼 터트리고 싶었다

    진흙처럼 온 몸을 반죽해대는

    인연의 실루엣같은 연꽃이 피었다

    그 외는 아무것도 인화되지 못하게

    샤워꼭지를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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