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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 사적 제502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6. 20. 04:18

    吐含山 佛國寺(토함산 불국사)

     

     

    불이문(不二門)

     

    불이(不二)란 ‘진리는 둘이 아니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생과 사, 만남과 헤어짐,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근원적으로 모두 하나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고 언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상징으로

    『유마경』에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해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들어서는 문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바로 도리천에 다다른다.

    사찰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기도 하다.

    교리적으로 보면 불국사에서는 자하문(紫霞門)이 불이문의 자리라고 보면 된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거치는데, 이들 다리의 계단은 모두 33개로

    도리천의 33천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문을 통과해야 부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 사적 제502호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하여 개창되고,

    혜공왕(惠恭王) 10년(774)에 완성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26년(1593) 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웠고, 1969~1973년 처음 건립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서 길이 90여m 되는 석축과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위에 자하문(紫霞門).

    대웅전(大雄殿). 무설전(無說殿)이 남북으로 놓였고 석가탑(釋迦塔). 다보탑(多寶塔)이 서 있다.

    그 서쪽에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안양문(安養門)과

    여래좌상(如來坐像) 금동아미타불(金銅阿彌陀佛)을 모신 극락전(極樂殿)이 있다.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을 모신

    비로전(毘盧殿)과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찬미하던 수도자들이 불도를 닦던 곳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불교 미술의 정수로,

    1995년 석굴암(石窟庵)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진현동 15-1) 대한불교조계종 불국사

    자료출처:불국사 www.bulguksa.or.kr/

     

     

     

    吐含山 佛國寺 復元 記念碑(토함산 불국사 복원 기념비)

     

     

    당간지주(幢竿支柱)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경내 입구 대석단 앞에 동서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있다.

    동편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고 하겠으나

    양 기둥의 하부가 절단된 것을 1924년도에 시멘트로 접합하였고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는 동편 당간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석조유물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형이나 장식적인 의장면에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편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원래 용도가 단절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괘불을

    현괘하기 위한 용도로 다시 고안된 사례로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양 기둥의 양식이나 제작연대가 다른 것을 조합하고 있어

    조형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자하문(紫霞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통하는 중문(中門).

    백운교와 청운교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부처님의 나라가 전개된다.

    자하문은 부처님의 몸에서 비추는 자금광(紫金光)이 안개처럼 서린문이라는 뜻이다.

    건립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기단의 주춧돌과 신방석(信防石).

    문지방돌 등이 통일신라시대(676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문도 그 무렵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 후 1436년에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1593년) 불타 버린 것을 1628년에 재건하였으며,

    1630년에 중창하고, 1781년에 중건하여, 196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넓은 석조(石造)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세워진 지금의 이 문은,

    다포계(多包系)의 공포(栱包)를 짜 올린 팔각(八角) 지붕을 하고 있으며,

    건축 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 국보 제23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구식 석축(架構式 石築) - 보물 제1745호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축조된 가구식 석축과 조화를 이룬 청운·백운교가 놓였고,

    그 앞에는 평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구품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다.

    가람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면에 안양문을 세우고, 그 앞에는 연화·칠보교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극락전 주위에는 안양문과 연결하여 회랑이 둘러졌는데,

    동쪽에는 대웅전 회랑과 연결되어 별도의 회랑을 두지 않았다.

    안양문과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구식 석축이 동서로 놓였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 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구역의 서측회랑 하부 석축이 포함되는데,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안양문(安養門)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전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이다.

    연화교, 칠보교(국보 제22호)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정토가 전개된다.

    ‘안양’이라는 이름은 ‘극락’을 뜻한다.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이 문은

    1593년 임진왜란 때 타 버린 것을 1626년과 1737년에 중건했다.

    현재 안양문은 정면3칸, 측면2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1964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서 고려 건축양식을 채택하였고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한 것이라 하겠다.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범영루(泛影樓)

     

    범영루는 75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12년과 1688년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정면 1칸, 측면 2칸, 3층의 옛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이다.

    범영루에 지금은 법고(法鼓)가 매달려 있으나

    원래는 범종각(梵鐘閣)으로써 범영루는 범종각의 이름이다.

    누각의 모양을 하였으므로 루(樓)라 하였고 범영(泛影)은 범종의 소리를

    그림자에 비유하여 범종의 소리가 온 누리에 번져서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최초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한다.

    이는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팔각(八角)정상에 108명이 앉을 수 있도록 누를 짓고

    아래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정상은 욕계(欲界) 33천의 위이다.

    108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번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미범종각이라는 이름은 소리가 33천의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를 씻어 없애주는 것을 뜻한다.

     

     

     

    석조(石槽)

     

    석조는 큰 돌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로, 흔히 큰 절에 설치되었다.

     

     

    다보탑(多寶塔) - 국보 제20호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삼층석탑(三層石塔) 석가탑(釋迦塔) - 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1744호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大雄殿重創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歷惠恭世,

    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무설전(無說殿)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강당, 말로써 경론을 강술하는 곳 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라고하는

    수단으로써는 도달 할 수없는 언어도단 (言語道斷)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다.

    670년 개창(開創)되자 중국에서 돌아온 의상(義湘) 대사가 최초로 강론을 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48년과 1708년에 중건하여 1910년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그 뒤 허물어 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유지(遺址)의 기단 위에 옛 크기대로 32 칸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 양식은 맞배집으로서 조선에 속한다. 

     

    비로전(毘盧殿)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모신 법당이다.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탄 것을 1660년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다.

    건축 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비로자나부처(毘盧舍那佛)님은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본존불(本尊佛)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한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 국보 제26호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조선 초기(1400년경) 건축양식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이승에서 고난받는 중생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의 신앙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다.

    원래 992년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기에

    이로써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바위솔(瓦松, 와송)

     

    다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한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산지의 바위 겉이나 지붕 위의 습한 기왓장에서 자란다.

    근생엽은 로제트형으로 퍼지고 원줄기에는 경생엽이 다닥다닥 달린다.

    잎은 잎자루가 없으며 육질의 피침형이고 녹색이지만 자주색과 분백색을 띤다.

    8~9월에 개화하며 길이6~15cm정도의 총상꽃차례에 화경이 없는 백색의 꽃이 밀착한다.

    ‘둥근바위솔’과 비슷하지만 잎 끝이 뾰족하여 굳어져서 가시처럼 되고 꽃밥은 암적자색이다.

    기와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같다고 하여 ‘와송(瓦松)’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 외 지붕지기, 지부지기, 집웅지기, 넓은잎지붕지기,

    오송, 넓은잎바위솔, 지붕직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간열, 간염, 강장, 소종, 습진, 옹종, 유방암, 이습지리, 자궁암, 종독,

    지혈, 치창, 청열해독, 통경, 학질, 해열,화상 등에 효능이 있다.

     

     

    사리탑(舍利塔) - 보물 제61호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한전(羅漢殿)

     

    부처님의 제자상을 모신 곳으로 열여섯 분을 모셨으므로

    16나한전 또는 16응진전(十六應眞殿)이라고도 한다.

    1593년 왜구의 침략으로 타 버린 뒤 1647년에 나한상을 조성하고 전각을 세웠으며,

    1760년 중창 불사 때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1973년에 중수하였다.

     

     

     

    극락전(極樂殿)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모시는 법당.

    이 법당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한 750년경 6칸으로 건립되었으나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750년에 중창에 중창하고 1925년에 중수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의 다포계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안에 높은 기둥 네 개를 세웠고, 안쪽 두 기둥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벽화(壁畵)를 그렸다.

    본래의 벽화는 1514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지금의 후불벽화는 1973년 중건 때 조성한 것이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 줄로 된 16단의 계단이 있으며,

    이 48개의 계단은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大願)을 표현한다.

    극락전 앞 석등(長明燈)이 단아하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장명등은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중생들에게 밝혀주는 등불이다.

    대웅전 앞 석등과 그 모양이 똑 같아 동시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이므로 법당 이름을 극락전이라고 한다.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은

    국보 제27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로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은 법구사물(法具四物) 중의 하나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구이며,

    시간을 알리거나 공양과 예배를 알리는 기구이다.

    이 범종의 천판(天板)에는 한 마리의 용으로 뉴(鈕)를 두고 그 옆에 음통(音筒)이 마련되어 있으며

    종신(鐘身) 상부에는 두 점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돌린 상대(上帶)를 돌려는데,

    그 두 점선 사이 칸 안에 연당초문을 돋을무늬로 채우고

    그 아래 상대와 같은 대(帶)로 사방위에 네 개의 정방형의 연곽(蓮廓)을 마련하고

    각각 그 안에 9개의 꽃잎 가운데 유두(乳頭)모양의 꼭지 둔 연뢰(蓮蕾)를 두었다.

    또한 종신 허리 부분에는 비천인상 4개를 유곽과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돋을 문양으로 배치하였고

    그 사이 두 곳에 연꽃문양의 당좌(撞座)를 표현하였으며,

    종구(鐘口)에는 상대(上帶)처럼 하대(下帶)를두었는데 문양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형태는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771년에 만든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높이 333cm)을 모방해서 만든 근세의 작품이다.

     

     

     

    천왕문(天王門)

     

    사대천왕(四天王門)안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셔 놓고 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에 살면서 제석천왕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지역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래서 사바 속세와 경계지간 가까운 곳에 마련 되었다. 천상의 수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불법과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써 가람(伽藍)의 삼문(三門) 중의 하나이다.

    비파를 지니고 있는 신(神)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신(神)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서쪽을 지키는 신(神)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龍)을 쥐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신(神)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塔)을 들고 있다.

     

     

     

    불국사 관음송(佛國寺 觀音松)

     

    학명 : Pinus densiflord for multi caulis Uyeki

    나이 : 100년(2018년 기준)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으로 한국 원산이며

    처음에는 현위치에서 서남쪽 500m 아래쪽에 심어졌던 것을 1987년 봄에 이곳으로 이식하여

    많은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불국사의 중요 조경수이다.

     

     

     

    世界遺産 佛國寺(세계유산 불국사)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에서 첫번째의 문으로

    일주(一柱)라는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사찰에 들어서기 전 세속의 번뇌를 불법으로 깨끗이 씻고

    진리의 세계를 향해 일심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불국사 일주문은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1973년 중창 때

    진입의 편의를 위해 현 위치에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다포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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