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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溫陵) - 중종 비 단경왕후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7. 24. 04:19
단경왕후(端敬王后) 이야기
단경왕후 신씨(재세 : 1487년 음력 1월 14일 ~ 1557년 음력 12월 7일)는
본관이 거창인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 부부인 한 씨의 딸로 1487년(성종 18)에 태어났다.
1499년(연산 5)에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이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역적(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을 반대했었음)이라는
이유로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 씨가 세상을 떠나자
폐비 신씨의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1557년(명종 12)에 사저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왕후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온릉 재실(溫陵 齋室) - 능의 관리와 제례준비를 위한 진입공간
세계유산 조선왕릉(世界遺産 朝鮮王陵)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홍살문(紅살門)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나무 건축물로 출입문의 역할을 했지만,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시되었던 문(門)이다.
형태는 한자 '門(문)'의 형상에서 따온 것이다.
문이지만 주변에 담장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목적은 없다.
9m 이상의 둥근기둥을 지주석 위에 고정시키고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문짝은 달지 않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삼태극 문양을 설치했다.
하지만 태극문양과 삼지창이 없는 형태도 많다.
홍살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 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홍살문을 설치하는 곳은 서원이나 향교에 설치하였으며, 집안 재실에도 설치하였다.
또한 능과 묘에도 설치했으며 충신, 열녀,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도 홍살문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신성시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향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박석(薄石, 얇은 돌)이 두 줄로 넓게 깔린 길을 말한다.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하였으나 문화재청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왜곡된 왕릉 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香御路)로 변경하였다.
왼쪽에 신(神)이 가는 길을 ‘향로(香路·神路)’라 하고,
오른쪽에 왕 또는 제관이 가는 길을 ‘어로(御路)’라 한다.
좌측의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향로(香路)
어로(御路)
정자각 주변에는 여러 곳에서 총탄 자국을 볼 수 있다.
향어로(香御路)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 신로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 배 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 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능에 모신 분을 위하여 제례를 드리는 곳이다.
지붕 모양이 정(丁) 자를 이루고 있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정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자각 오른편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소맷돌이 있는 왼쪽의 계단은 혼령이 오르는 곳이고,
오른쪽의 계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관이 오르는 곳이다.
정자각 왼편의 계단은 제관이 축문을 태우러 갈 때 사용한다.
수복방(守僕房) 터
비각 옆에는 수복방의 주춧돌과 기단으로 사용, 추정되는 돌과 터가 남아 있다.
온릉 비각(溫陵 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온릉 표석은 단경왕후가 복위된 후 1807년(순조 7)에 세운 표석이다.
朝鮮國 端敬王后 溫陵(조선국 단경 왕후 온릉)
온릉 비에는 6.25 때 총탄을 맞은 흔적이 선명하다.
恭昭順烈端敬王后愼氏 中宗大王元妃 成化二十三年丁未正月十四日誕生
正德元年丙寅正位中壼未幾遜于私第
嘉靖三十六年丁巳十二月七日昇遐 葬于楊州西山長興面水回洞亥坐之原 壽七十一
英宗己未復位上諡 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四月 日 立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
공소순열 단경왕후 신 씨는 중종대왕의 원비이다.
성화 23년(정미년, 1487) 1월 14일에 탄생하여,
정덕 원년(병인년, 1506)에 중곤(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개인 주택)로 나갔다.
가정 36년(정사년, 1557) 12월 7일에 승하하여
양주 서산 장흥면 수희동 해좌(북북서)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이는 71세이다.
영종(영조) 기미년(1739)에 복위하여 시호를 올렸다.
승정 기원 후 180년(정묘년, 1807) 4월에 세우다.
산신석(山神石)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으로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웠다.
예감(隸坎) -망료위(望燎位)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 자 형태로 나무 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대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능의 구성
온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이다.
1739년(영조 15)에 단경왕후가 복위되면서 조선 후기의 추존 왕비릉 제도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1쌍과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능의 역사
중종의 폐비 신 씨가 1557년(명종 12)에 세상을 떠나자
친정 집안인 거창 신 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정릉(貞陵)과 사릉(思陵)의 예에 따라 새롭게 조성하였다.
사적 제210호 온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조선왕릉) 등재
상설도 해설
온릉(溫陵) - 중종 비 단경왕후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는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연산군 5년) 중종(진성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15년(중종 10년)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복위론(復位論)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1557년(명종 12년)에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에 왕비로 복위되어
시호(諡號)를 단경왕후, 능의 이름(능호)을 온릉이라 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일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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