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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주사 대웅보전(龍珠寺 大雄寶殿) - 보물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7. 25. 04:04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어 대웅보전을 올렸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다.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 비운(飛雲) 그리고 모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용주사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丁字閣)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융릉(추존 장조와 현경왕후의 능)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한 공장(工匠)들이

    용주사를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대웅보전 삼세불상(大雄寶殿 三世佛像) – 경기도 유형문화재

     

    대웅보전 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석가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하였다.

    대웅전의 닫집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보면 불상조성의 시말을 알 수 있는데,

    불상조성은 상계(商界)·설훈(雪訓)·계초(戒初)·봉현(奉玹)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처음 시작하여 9월 30일에 완성하였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 1일에 나라안의 명승을 초빙하여 점안식을 거행하였고,

    또한 위의 기록보다 후에 작성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 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가 각 조성하였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쥐고있다 .

    한편 당시 대구 동화사(桐華寺) 승려였던 인악대사 의첨(義沾, 1746~1796)스님이

    왕명으로 삼세불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株寺佛腹藏奉安文)>을 지었는데,

    국왕의 성은을 칭송하고 왕실의 안락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스님이 찬한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경찬소(慶讚蔬)>가

    《인악집(仁嶽集)》에 전하는데 정조가 이 글들을 읽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석가, 약사, 아미타부처님은 우리 나라 불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되어 왔다.

    특히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 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易行道)로서 크게 신앙되었다.

     

     

     

    팔상도(八相圖)

     

    용주사 대웅보전 외부에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서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고 열반에 드는 한 생애를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팔상도는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

    ②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③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상(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녹야전법상, 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龍珠寺 大雄寶殿) - 보물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으로

    흔히 사찰 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 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이름하였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다음과 같으니,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비운(飛雲)·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절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융릉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졌던 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공장(工匠)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다.

    2017년 8월 14일 보물 제194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 www.yongjoo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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