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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강 이승훈 선생상(南岡 李昇薰 先生像)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1. 10. 20:14

    동상 좌대에는 민족의 선각자들이 태극기를 치켜들고 독립을 부르짖는 모습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서력 1864년 갑자년 3월 25일에 평안도 정주 본집에서

    여주 이석주(驪州 李碩柱)씨 둘째 아들로 나니 모친은 홍주김씨라

    어리어서부터 밝고 참되니 사람들의 믿음을 받다 중년에 무역상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도 이 갸륵한 인격이 신용의 밑천이 된 것이다.

    1907년 정미년 6월에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과 만나

    뜻이 서로 맞아 신민회에 들고 향지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우고 일변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세우니 모두 나라 일이라 이로부터 선생의 국가적 생활이 시작되다.

    1919 기미년 33인의 하나로 옥에 들어간 것까지 옥에 가기가 세 번이요

    있기가 전후 아홉해 선생의 백발이 옥중에서 난 것이다.

    예수교에 도타운 신앙을 가지어 오래 장로로 있었고

    오늘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재단법인 오산고등보통학교 이사장이다.

    선생의 품에 자라난 오산학원 동창들이 선생의 은헤를 기념할까 하고

    힘을 모도아 이에 선생의 동상을 세우니 서력 1929 기사년 11월 30일이라

    글 : 李光洙(이광수)

     

    동상 재건에 부치는 글

    남강 선생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별이요 나라의 밝은 등불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 독실(篤實)한 종교인이요 민족의 독립(獨立)을 위하여 생애를 바친

    뛰어난 애국자(愛國者)요 젊은이를 가르치는데 온갖 정성(情性)을 다한 훌륭한 교육자요

    민중의 복지를 위하여 분투(奮鬪) 노력한 사회봉사자(社會奉仕者)였다.

    선생의 뛰어난 정신(情神)과 빛나는 인격(人格)은 우리 겨레의 거울이요 자랑이다.

    1936년 평안북도(平安北道) 오산(五山) 학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었으나

    잔인무도한 일제는 1943년 이것을 강제로 철거하였다.

    오직 나라사랑의 일념(一念)으로 일관하신 선생님은

    서기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서울 보광동에 재건된 오산학교의 동창들과 사회유지(社會有志)들의 정성과 힘을 모아

    선생의 동상을 원형(原形)대로 다시 세워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념비(精神的記念碑)로 삼는다.

    1974년 10월 3일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 재건위원회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재건위원회(南岡 李昇薰 先生 銅像再建委員會)

    회장 한경직(韓景職), 위원장 허순오(許順五)외 일동

     

     

     

    전면 제자(前面題字) : 대통령 박정희

    조각 : 민복진

    재건문 : 안병욱

    글씨 : 김충현

    남강 이승훈선생동상재건위원회

     

     

     

    남강 이승훈 선생상(南岡 李昇薰 先生像)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10-1-16

    남강 이승훈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초창기에는 산업 경영에 전력했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게 가졌고,

    그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말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고,

    1919년 민족대표로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선생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고, 물산장려 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민족 언론 경영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9일 67세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 안악 사건(安岳事件) :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서간도에 세우려고 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

    관련 인사 160여 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으로 안명근 사건이라고도 한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능동) 서울 어린이대공원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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