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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흥민씨(驪興閔氏) - 대전 뿌리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1. 12. 13. 04:12

    여흥민씨 유래와 행적(驪興閔氏 由來와 行蹟)

     

    우리 겨레는 고래로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도덕을 숭상하고 절의를 존중하여 왔으며,

    어질고 착하고 예의 바른 민족으로서 東方仁國(동방인국)을 이루어 왔다.

    우리 閔門(민문)의 조상들은 여러가지 미덕과 양풍을 이어받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면서 연면하게 이 나라를 빛내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여왔다.

    빛나는 공적을 세운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로 충절 활동을 소개하여

    후세의 교훈이 되며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여흥민씨의 본관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의 옛 이름이며 여흥 단본으로 통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 때 尙衣奉御(상의봉어)를 지낸 휘(諱) 칭도(稱道)이며,

    여흥민씨는 조선왕조 때 네 분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니

    즉 태종비 元敬王后(원경왕후), 숙종비 仁顯王后(인현왕후),

    고종황제비 明成皇后(명성황후), 순종황제비 純明皇后(순명황후) 등이다.

    원경왕후는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시며, 인현왕후는 예의 바르고 정숙하신 분이시며,

    명성황후는 기울어 가는 왕조와 나라를 위하여 勞心焦思(노심초사) 정성을 다하신 분이시다.
    고려조가 망하자 절개를 지켰던 杜門洞(두문동) 諸賢(제현) 가운데

    민씨로는 安富(안부) 농은공, 普文(보문) 소윤공, 愉(유) 여흥군 세분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汝雲(여운) 仁老(인로) 등 의병장들과 호성공신 希騫(희건) 여원군을 위시하여

    많은 민문종족이 용감하게 왜적과 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성 충민공과 그의 아들 3형제 등 가족 13명이 모두 순절하였으며

    경상우병사 栐(영) 충장공도 순절하였다.

    한말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泳煥(영환) 충정공은 백관을 이끌고 궁궐에 연좌하여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국민에 고하는 애절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뒤에 그 혈의를 두었던 곳에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마루의 틈새로 돋아나와

    푸르고 늠름한 모양을 띠었으니 그것을 血竹(혈죽)이라고 한다.

    한말과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충정공 이외에도 肯鎬(긍호), 宗植(종식) 등 의병장들과

    致道(치도), 弼鎬(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하거나 옥사하였으며

    혹은 만주벌판과 중국 광야에서 風餐露宿(풍찬노숙)하면서

    일편단심 겨레의 생존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니

    그 우국충정을 길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父母孝養(부모효양)하고 見善必行(경선필행)하며

    患難相救(환난상구)하고 隣里和同(인리화동)하던 옛 미풍을

    오늘에 되살려 국가사회 발전의 一翼(일익)이 되고자 한다.

    우리 선조의 거룩한 大義(대의)를 밝혀서 百世淸風(백세청풍)의 아름다운 良俗(양속)이

    이어지고 도덕정신이 發揚(발양)되도록 하자고 하는 뜻에서 이 조형물을 세운다.
    1997년 9월 20일
    여흥민씨 대종중(驪興閔氏 大宗中)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364 뿌리공원 內

     

     

     

    작품명 : 충효(忠孝)

     

    조각가 : 최영근(崔榮根, 한남대학교 응용미술과 교수)

    작품 설명 : 외형의 문(門) 자 모양은 성(姓) 자를 표현한 것이며

    중앙부위의 竹筍(죽순) 및 文(문)자 모양과 좌대의 서책(書冊) 모양은

    先祖(선조)들이 崇尙(숭상)하시었던 학문과 행실, 충절과 신의를

    교육의 指標(지표)로 삼은 四敎(사교)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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