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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요산 자재암(逍遙山 自在庵)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21. 12. 24. 23:05

    逍遙山 自在庵(소요산 자재암)

     

    소요(逍遙)의 逍(소)는 肖(닮을 초) +辵(쉬엄쉬엄 갈 착)을 합성하여

    시간을 느릿하게 보내며 걷는다는 뜻이고,

    遙(요)는䍃(질그릇요) +辵(쉬엄쉬엄 갈 착),

    즉 무거운 질그릇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글자가 합쳐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전적 의미는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즉 산책(散策)을 말한다.

    974년(고려 광종25)에 소요산(逍遙山)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서화담(서경덕)과 양사언(양봉래)과 매월당(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고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재암 일주문(自在庵 一柱門)

     

    정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에는 ‘逍遙山自在庵(소요산자재암)’, 京畿小金剛(경기소금강)‘이라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백팔계단(百八階段)

     

    108번뇌(百八煩惱)를 의미하는 것으로 108번뇌는 육관(耳, 目, 口, 鼻, 心, 體)의

    좋고(好), 나쁨(惡), 평등(平等)의 3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되는데(3×6=18),

    여기에 탐(貪), 불탐(不貪)이 있고(18×2=36),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3世(36×3=108)가 있으니 이것을 백팔번뇌라 한다.

     

     

     

     

    금강문(金剛門)

     

    신광불매 만고휘유 입차문래 막존지해

    (神光不眛 萬古輝猷 入此門內 莫存知解)

     

    신비한 광명이 어둠을 깨치고 만고에 오랫동안 그 빛을 발하니

    불법의 문안으로 들어오려면 아는 체하는 분별심을 버려라.

     

    김시습(매월당)이 자주 거닐던 산인 소요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휴양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비롯해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의

    여섯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다.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요산은 계곡과 폭포를 찾는 이들이 많고,

    산 중턱에 있는 명사찰 자재암까지의 산행도 해볼 만하다.

    자재암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길이 가파르지만

    능선으로 접어들면 경사가 완만해 무리한 산행은 아니다.

    진달래가 필 무렵인 4월 초부터 단풍이 지는 10월 말까지 특히 아름답다.

     

     
     

     

    원효대(元曉臺)

     

    이곳은 원효 스님이 정진 중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머물며 좌정하고 수도하던 장소로 원효대로 불린 곳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탐욕도 벗어놓고 화냄도 벗어놓고 -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자재암 백운암(自在庵 白雲庵)

     

    자재암의 선방(요사채)으로 지어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잘 쌓여진 높다란 석축 위에 1961년 중창 때 건립되었다.

     
     

     

     

    모노레일

     

    자재암의 짐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한 모노레일

     

     

     

    아무리 비바람이 때린다 할지라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진 사람은 뜻이 굳세어

    비방과 칭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법정스님 ‘버리고 떠나기’에서 -

     
     

     

     

    자재암 나한전(自在庵 羅漢殿)

     

    독립암 아래 기암괴석 아래에 위치한 천연동굴로서

    창건 당시 원효스님께서 수행하였다는 수행처였으며,

    1812년 학산 윤제홍이 그린 <소요사 방화굴>이란 그림에 보면 불상을 봉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나한전은 근대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1961년 이후 세워진 것이다.

    나한전 내부에는 16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逍遙山自在庵 羅漢殿佛事記碑(소요산자재암 나한전불사기비)

     

    1980년 조성한 나한전의 불사를 기념하여 1981년 세운 비석으로

    비문은 이종익(李鍾益)이 짓고, 김응현(金應顯)이 썼다.

    비문에는 자재암의 내력과 함께 나한전 불사의 시주자가 기록되어 있다.

     
     
     
     

    원효(元曉) 스님과 관음보살의 설화

     

    자재암에는 원효 스님이 관음보살을 만나 자신의 수행력을 인증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오로지 수행일념으로 이곳을 찾아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 하던 때였다.

    어느 폭풍우 치는 깊은 밤 선정에 든 원효 스님은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끼며 무서운 내면의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 순간 원효스님은 눈을 번적 떴다.

    "원효 스님, 원효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망설이다 문을 여니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져버렸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여인을 토막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스님은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기자 비에 젖어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여인을 보지 않으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지만,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하여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해골은 물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일체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 내 어찌 더 이상 속으랴'

    스님은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가서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하였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고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순간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스님은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무한한 희열을 느끼고 있는데,

    여인도 목욕해야겠다며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여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고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순간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혼돈이 일어났고,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스님은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자

    폭포소리가 들리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나서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생겨 가지가지 법이 낳은 것이니,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멸하면 또 가지가지 법이 없어진다.

    원효의 이 말에 여인은 미소를 머금고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그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임을 이내 깨달은 원효스님은 더욱더 수행에 전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 출처 : 『양주군지』(1978년, 양주군, 양주군지 편집위원회)

     

     

     

     

     

    원효샘

     

    동양 삼국 불교계의 거인인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차(茶)의 달인으로도

    차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고승이다.
    스님은 전국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을 창건하였는데

    원효 스님이 자리를 잡은 절터엔 필연적으로 약수가 나오며

    찻물로는 으뜸인 석간수(石間水)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중 1,300여 년 전 수행하셨던 소요산 자재암의 원효샘 석간수는

    찻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수(名水)로 이름 나 있다.
    신라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특히 고려시대 시인인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1168~1241)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하는 등

    원효샘은 전국에서 유명한 차 문화 유적지가 되었다.

     

     
     
     

    자재암 삼성각(自在庵 三聖閣)

     

    원래 이 자리에는 1967년 4월 문성준(文聲準) 스님이 중건한 산신각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가 너무 좁아서 1977년 법조(法照) 스님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확장하고 삼성각이라 하였다.

    삼성각 안에는 자재암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14년 무렵에 조성한 칠성탱과 근래에 조성한 독성탱, 산신탱,

    그리고 독성상과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다.

     

     
     

     

    자재암 요사(自在庵 寮舍)

     

    자재암에는 현재 2동의 요사가 있다.

    하나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종무소와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수전이며,

    다른 하나는 보타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주지스님의 집무실과 스님들의 거주처로 사용하고 있다.

     
     

     

     

    자재암 대웅전(自在庵 大雄殿) - 향토유적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 진정(眞靜) 스님이 불사하여 지은 것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대웅전(大雄殿)이란 편액과 4점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주련은 『대지도론(大智度論)』 권 4와 『치문경훈(緇門警訓)』 권 10 「찬불사불게(讚佛沙弗偈)」

    등에 나오는 구절로 다음과 같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하늘과 땅 사이에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니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 비할 이 없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모든 것 다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 없네.

     

    이외에 건물의 외벽에는 산수도를 그려 장엄하였고,

    중앙 어간 기둥 위와 모서리 기둥 위에 올려놓은 용머리 모양의 안초공이 이채롭다.

    귀공포는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법당 내부에 모셔진 존상으로는 ‘석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

    ‘대세지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 ‘위태천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불화로는 1991년에 조성한 <삼세불후불탱>과 <지장시왕탱>,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에 1977년 조성한 범종이 하나 있다.

     

     
     

     

    세월은 무상(無常)한 것,

    오늘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리

     
     

     

     

    원효폭포와 원효굴

     

    소요산 관광지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800m쯤 올라가면

    좌측에 층암절벽 사이로 힘차게 내려 뿜는 물기둥이 벽공을 찌르는 듯 우뚝한데

    폭포 아래에서 피어나는 물보라는 환상적인 전경을 자아낸다..
    옛날 원효대사가 폭포 우측 원효대에 앉아 고행수도 했다는 전설이 있어

    예부터 이 폭포를 원효폭포라고 부른다.

    이 폭포 옆으로 원효굴이라는 작은 굴이 있는데

    굴 안에는 석조약사여래불상을 조성하여 모셨다.

     

     

     

     
     

     

    자재암(自在庵) - 향토유적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증건했다.

    그 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元空禪師)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순종 원년(1907) 정미의병(丁未義兵)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때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을, 1971년에 요사를,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했다.

    경내와 주변에는 1980년에 조성한 석굴, 추담대사 사리탑, 속리교, 세심교가 있다.

    최초의 창건자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아들 설총(薛聰)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宮地)와 사자암지,

    소요사지, 현암지, 원효사지, 조선 태조 행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고,

    의상대, 나한대, 금송굴, 선녀탕, 선녀폭포, 청량폭포 등이 있어 경관(景觀)을 더해주고 있다.

     

     

     

     

    자재암(自在庵)의 유래

     

    원효 성사께서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있은 후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두절된 심산유곡을 찾아 산자수명한 아름다운 이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높은 수행을 쌓았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심야에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은 아녀자로 화현(化現)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께서 원효 스님에게 하룻밤 쉬어 가기를 원했고,

    중생구제(衆生救濟)의 구실을 붙여 수도 일념의 심지(心地)를 시험하였으니

    원효대사 이르기를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이요,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이라,

    ‘마음이 생한즉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가지가지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한즉 생대적 시비의 가지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는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하는 법문(法門)에 그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원효대사는 관세음보살의 화현(化現) 임을 알았고, 그 후 지극한 정진으로 더욱 깊은 수행을 쌓았으며

    후학을 교계(敎誡)할 생각으로 정사(精舍)를 지었다.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정사를 이름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2910번길 145 (상봉암동) 소요산 자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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