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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운 어머니 – 백범 김구의 가족
    일상생활속에서/작품속으로 2022. 1. 23. 19:14

    그리운 어머니 – 백범 김구의 가족

     

    청년 시절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1949) 선생의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다.

    그는 21살이던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명분으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있던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였다.

    이것이 치하포 사건(鵄河浦 事件)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황해도 해주감영(海州監營)에 체포됐다.

    그에겐 도적질을 위해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그는 1896년 8월초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그의 아버지(김순영), 어머니(곽낙원)도 인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겨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때 ‘청년 김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리운 어머니

     

    1934년 남경에서 재회한 김구 가족(좌) / 1934년 가흥 엄항섭 집에서의 김구 가족

    왼쪽부터 맏아들 김인, 김구, 둘째 아들 김신, 앉아있는 사람 어머니 곽낙원 여사

     
     
     
     

    어머니 곽낙원(郭樂)

    청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수감되자 함께 인천으로 왔다.

    객주 박영문과 안호연의 집에 머물며 옷과 밥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 세 번 아들의 감옥에 밥을 가져다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백범 김구의 중국 임시정부 생활에도 독립운동을 끝까지 지원하고 격려하며

    민족의 스승을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아들 김창수(김구)가 치하포사건(鵄河浦 事件)으로 인천 감리서 감옥으로 이감되자

    곽낙원 여사와 함께 이주하여 아들의 옥바라지에 열중하는 한편,

    1897년부터 수차례 법무대신 한규설에게 청원서를 올렸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898년 3월 김창수가 인천 감옥을 탈옥한 이후 대신 감옥에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1901년 1월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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