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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3. 4. 21:11

    조선왕릉 세계유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릉(영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유적임을 인정함.

    등재일자: 2009. 6. 30.

    유네스코 사무총장

     

     

     
     

    연지(蓮池) - 지당(池塘)

     

    조선시대의 풍수지리 사상은 음택(陰宅) 풍수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왕릉의 연지(蓮池) 조성과도 연관이 있다.

    옛사람들은 양택인 경우에 그 혈장(穴藏)이 넓어야 하고

    음택인 경우에는 혈장이 꽉 짜이게 입구가 좁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왕릉의 입구는 오므라진 산세를 하고 있는 곳이 많다.

    오므라들지 않은 곳은 기(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숲과 연못[池塘]을 조성하기도 했다.

     
     
     
     

    보물(寶物) - 여주 효종 영릉 재실(驪州 孝宗 寧陵 齋室)

     

    재실은 능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이 지내는 곳이며,

    제관이 머물며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기를 보관하는 등 제사를 준비하는 집이다.

    효종 영릉 재실은 원래 현종 즉위년(1659)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능을 만들 때

    근처에 지었던 것을 효종 14년(1673) 이곳으로 옮기면서 함께 지었으며,

    안향청(제사에 쓰는 향을 보관하는 곳), 제기고(제사에 쓰는 그릇을 보관하는 곳),

    재방, 행랑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없어져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재실은 2007년 11월 29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 -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회양목(淮陽木)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와 같이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효종대왕 영릉(寧陵) 재실(齋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2005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영릉(寧陵) 재실 우물

     
     
     
     

    나무에 달린 혹(瘤, 유)

     
     
     
     

    영릉 홍살문(寧陵 紅箭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향어로(香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박석(薄石, 얇은 돌)이 두 줄로 넓게 깔린 길을 말한다.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하였으나 문화재청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왜곡된 왕릉 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香御路)로 변경하였다.

    왼쪽은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 신(神)이 가는 길이라 ‘향로(香路·神路)’라 하고,

    오른쪽은 제향을 드리러 온 왕 또는 제관이 가는 길이라 ‘어로(御路)’라 한다.

    관광객 및 방문객은 어로를 이용해 걸어가야 한다.

    좌측의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판위(版位)

     

    효종 영릉의 판위는 다른 왕릉과 달리 박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능의 출입문 격인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가로 세로 각 1.5m 정도의 사각형 자리가 있다.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제관(祭官)들이 도착하였을 때

    사배(四拜)로써 인사를 드리고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곳이다.

     

     
     
     

    금천교(禁川橋)

     

    대부분의 조선 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특이하게도 효종대왕 영릉의 금천교는 홍살문을 지나 향어로 중간에 조성되어 있다.

    금천교는 왕릉의 입구에 위치한 돌다리로 왕릉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금천교를 경계로 속세의 영역과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나누어지며

    금천교를 건너는 순간 신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릉의 금천교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 오라’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뜻하는 작은 시내를 말한다.

     
     
     
     

    수라간(水剌間)

     

    제향 음식을 관리하는 건물로 수복방의 맞은편에 있다.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는 수복자와 제사를 준비하는 관노(官奴), 하급 관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전 일곽 중 가정 소박한 건물이다.

    수직방(守直房)이라고도 하며, 통상 정자각(丁字閣) 동남쪽에 놓여

    제사 때 제관의 대기와 준비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정자각(丁字閣)

     

    건물 바닥 평면이 '정(丁)'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이 세 건물은 제향 봉행(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다.

     
     
     
     

    향어로(香御路)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의 신로(神路)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 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 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朝鮮國 孝宗大王寧陵(조선국 효종대왕 영릉)

     
     
     
     

    영릉 비각(寧陵 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자취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나 표석(表石)을 세워둔 곳이다.

    신도비는 태조(太祖) 대부터 세종(世宗) 대까지만 세웠고 이후의 왕릉(王陵)에는 세우지 않았다.

    현종 대부터 다시 세울 필요가 논의되어 숙종 8년(1682)에

    조선 왕릉 중 처음으로 영릉(寧陵)에 표석을 세웠다.

    표석 앞면의 글은 이정영이 썼고, 뒤면의 글은 심익현이 썼다.

     

    영릉 비문(번역문)

    기해년(1659) 5월 4일(갑자일)에 효종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이 훙(승하)하여

    같은 해 10월 29일(병진일)에 양주 건원릉(태조의 능) 근처 오른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계축년(1673) 10월 7일(계묘일)에 여주 영릉(세종의 능) 동쪽

    홍제동 자좌오향(남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다음 해 갑인년(1674) 2월 24일(무오일)에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가 훙(승하)하여

    같은 해 6월 4일(무술일)에 (대왕릉) 왼쪽 아래에 장사 지냈다.

     

     

     
     

    예감(隸坎) - 망료위(望燎位)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 자 형태로 나무 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대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의 능

     

     

     

     

    효종의 능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능의 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 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왕의 숲길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英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리 : 약 700m

    이동시간 : 15분(도보)

    개방시기 : 5월부터 10월까지 오전 9시 ~ 오후 5시

     
     
     
     

    영릉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6년 봉림대군으로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 생활하였다.

    1645년 조선으로 먼저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귀국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고, 청나라에 복수하고자 북벌을 계획하였다.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를 늘리고 새로운 조총과 화포를 개발하였으며,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상평통보를 유통시켜 상업과 수공업 발달의 기반도 마련하였다.

    효종은 북벌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에 41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인선왕후는 덕수장씨 장유의 딸로 1631년 당시 대군이던 효종과 혼인하였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효종과의 사이에 1명의 아들(현종)과 6명의 딸을 두었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의 건원릉 내에 왕릉을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의 틈새가 벌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자 1673년(현종 1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듬해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효종릉 아래쪽에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의 능이다.

    동원상하릉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곡장이 둘러져 있는 위의 능침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의 능침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49년에 왕위에 올랐다.

    10년간 재위하면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청나라를 치려는 북벌 계획을 세웠다.

    인선왕후는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남 6녀를 낳았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영릉의 금천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紅箭門)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특이하다.

     

    ※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왕과 왕후의 봉분을

    같은 언덕의 위쪽과 아래쪽에 조성한 무덤.(같은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형태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함.)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327 (왕대리) 효종대왕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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