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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릉(隆陵) -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3. 22. 21:13

    조선왕릉 세계유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릉(융릉, 건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 유적임을 인정함.

    등재일자 : 2009. 6. 30.

    유네스코 사무총장

     
     
     
     

    향나무 – 수령 140년(2008년 기준)

     

    Chinese Juniper, 측백나무과

    나무 속살에서 강한 향기가 나므로 향나무라 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서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향을 피우며, 여러 종교의식에도 널리 쓰인다.

    속살이 붉은빛을 띤 보라색이므로 흔히 자단(紫檀)이라고도 부른다.

     

     
     
     

    소나무

     

    Korean red pine, 소나무과

    우리와 가장 친숙하고 가장 흔한 바늘잎나무이다.

    옛사람들은 흉년에 먹을 것이 모자라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꽃가루를 털어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좋은 소나무는 임금님의 나무 널로도 쓰였다.

    오랫동안 우리 길에 가까이 있으면서 쓰임이 많았던 나무지만,

    숲이 우거지면서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 밀리고 재선충을 비롯한

    병충해가 많아 이 땅의 소나무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

     
     
     
     

    元大皇橋(원대황교) - 1970년 건설

     

     

     
     

    곤신지(坤申池)

     

    곤신지는 1789년(정조 19) 현륭원(융릉)이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이듬해에 조성한 원형의 연못이다.

    조선왕릉 중 드물게 연못을 원형으로 조성한 곳으로 ‘용의 여의주’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남서방향(坤申方)으로, 이 자리는 융릉의 생방이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 생방(生方) : 풍수지리 용어로 능, 묏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

     
     
     
     

    융릉(隆陵) -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융릉은 추존된 장조(莊祖 : 1735~1762, 사도세자)와

    헌경황후 홍씨(獻敬皇后 洪氏 : 1735~1815. 혜경궁)의 능이다.​

    장조는 영조의 아들로 2세에 왕세자가 되었고, 이후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붕당정치의 갈등에 희생되어 1762년(영조 38년)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고,

    무덤이 이곳으로 옮겨져 현륭원(顯隆園)이 되었다.

    1899년(광무 3년)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고, 능의 이름은 융릉이 되었다.

     

    헌경황후는 1744년(영조 20년)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 장조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경궁(惠慶宮)이 되었으며, 이후 자서전『한중록』을 집필하였다.

    1899년(광무 3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되었다.

    능에는 난간석이 없고 병풍석만 있는데, 병풍석에는 모란과 연꽃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이는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한 정조의 효심이 빚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사도(思悼) :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라는 뜻

    * 추존(追尊) : 세상을 떠난 후 신분 등을 높임

     

     
     
     

    상설도 해설

     

    1. 곡장(曲墻) : 능상(園寢)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

    2. 석호(石虎) : 능(陵)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호랑이

    3. 능상(陵上) :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병풍석이 주위를 두르고 있음.

    4. 석양(石羊) :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양

    5. 망주석(望柱石) : 봉분 좌우측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상부에 세호가 조각되어 있음.

    6. 상계(上階) : 능침 공간을 장대석으로 구분 지어 두 단으로 나누었을 때 맨 위의 단. 봉분이 중심임.

                       삼면이 곡장으로 둘려 있음.

    7. 장명등(長明燈) : 왕릉의 장생 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움.

                             석등은 팔각, 사각 형태로 하계 가운데에 배치함.

    8. 하계(下階) :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이 서 있는 제일 아래 단

    9. 예감(瘞坎) : 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묻거나 지방을 태워 묻는 곳.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함.

    10. 수라간(水刺間) : 정자각 서남측에 있으며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거나 데우는 건물로 부엌이 있음.

    11. 병풍석(屛風石) : 능상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주위를 12면으로 둘러놓은 돌.

    12. 혼유석(魂遊石) : '혼령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이라고도 함.

    13. 고석(鼓石) : 혼유석을 받치는 북 모양의 돌.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을 새겨 놓음.

    14. 문석인(文石人) : 장명등의 좌우에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뜻에서

                               양손에 홀(笏)을 쥐고 서 있음.

    15.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을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長劍)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각.

    16. 석마(石馬) : 말의 형상을 조각한 돌. 무석인의 한 발 뒤에 서 있음.

    17. 산신석(山神石) : 원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시설로 장례 후 3년간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

    18.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 공간의 중심적 건축물임.

                               정청(正廳)과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누어지며,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이 '丁(정)'자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함. 단청이 되어 있음.

    19. 비각(碑閣) : 비석이나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두는 곳.

    20. 참도(參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미터 정도의 돌길로 왼편이 신도(神道)이며,

                         오른편이 어도(御道) 임. 신도의 폭이 더 크며 높이도 약간 높음.

    21. 홍전문(紅箭門) :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또는 ‘신문(神門)’이라고도 함.

    22. 배위(拜位) : 헌관(獻官)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四拜) 함.

                         ‘판위(版位)’라고도 함.

    23. 곤신지(坤申池) : 궁궐의 연못을 모방하여 석축으로 축조한 연못.

    24. 금천교(禁川橋) : 능역의 신성함을 구분 짓는 돌로 쌓아 만든 다리.

     

     
     
     

    홍전문(紅箭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판위(版位)

     

    능의 출입문 격인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가로 세로 각 1.5m 정도의 사각형 자리가 있다.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제관(祭官)들이 도착하였을 때

    사배(四拜)로써 인사를 드리고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곳이다.

     
     
     
     

    향로와 어로(香路, 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박석(薄石, 얇은 돌)이 두 줄로 넓게 깔린 길을 말한다.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하였으나 문화재청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왜곡된 왕릉 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香御路)로 변경하였다.

    왼쪽은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 신(神)이 가는 길이라 ‘향로(香路)’라 하고,

    오른쪽은 제향을 드리러 온 왕 또는 제관이 가는 길이라 ‘어로(御路)’라 한다.

    좌측의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수라간(水剌間) - 제향 음식을 관리하는 건물.

     
     
     
     

    정자각(丁字閣)

     

    건물 바닥 평면이 '정(丁)'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이 세 건물은 제향 봉행(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다.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향어로(香御路)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의 신로(神路)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 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 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大韓(대한)
    莊祖懿皇帝隆陵(장조의황제융릉)
    獻敬懿皇后祔左(헌경의황후부좌)

     
     
     
     

    융릉 표석(隆陵 表石)

     

    융릉 표석은 1899년(광무 3)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에 현륭원 옆에 새로 세운 표석이다.

     

     

    융릉 비문 역문(隆陵 碑文 譯文)

     

    장조 사도 수덕돈경 홍인경지 장륜융범기명창휴

    찬원헌성계상현희 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의

    (원래) 표석은 정조선황제가 직접 쓴 것이다.

    을묘년(1795년)에 존호를 장륜융범기명창휴라 올렸고,

    철종 을묘년(1855년)에 존호를 찬원헌성계상현희라 올렸다.

    광무 3년(己亥, 1899년) 10월에 왕으로 추존하여 시호를 신문환무장헌광효,

    묘호를 장종, 능호를 융릉이라 올렸다.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의황제, 묘호를 장조라 올렸다.

    황후 효강 자희 정선 휘목 유정 인철계성 현경의황후 홍씨는 개국 344년(乙卯, 1735년)

    6월 18일에 탄생하여 갑자년(1744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임오년(1762년)에 혜빈의 칭호를 받았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순조 을해년(1815년) 12월 15일에 승하하였다. 나이는 81세이다.

    병자년(1816년) 3월 3일에 수원 현륭원 동봉(합장)으로 왼쪽에 장사 지냈다.

    철종 을묘년(1855년)에 존호를 유정이라 올렸고, 광무 3년(己亥, 1899년) 10월에

    왕후로 추존하여 휘호를 인철계성, 시호를 현경왕후라 올렸다.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의황후라 올렸다.

    이번에 또 원래의 표석 다음으로 표석을 세워 전면과 추기(追記, 추가한 내용)을

    공경히 써서 소자(고종)의 작은 정성을 표한다. 광무 4년(1900) 어느 날

     

     
     
     

    朝鮮國 思悼莊獻世子顯陵園

    (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릉원)

     
     
     
     

    현릉원 표석 (顯陵園 表石)

     

    현릉원 표석은 1789년 (정조 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이다.

     

    현륭원 비문 역문 ( 顯陵園 碑文 譯文)

     

    사도 수덕돈경 흥인경지 장헌세자는 승정기원후 108년(乙卯, 1735년) 1월 21일에 탄생하였다.

    처음 원자에 봉해지고 병진년(1736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기사년(1749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의 명을 받았다.

    임오년(1762년) 윤 5월 21일에 흥서 하였다. 나이는 28세이다.

    시호(諡號)를 추증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하였고, (같은 해) 7월 23일에

    양주 남중량포 배봉산(현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갑좌(동북동) 언덕에 장사 지냈다.

    소자(정조)가 왕 위에 오른 해(丙申, 1776년)에 추존하여 시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

    원호를 영우원(永祐園)이라 올렸고, 계묘년(1783년) 존호(尊號)를 수덕돈경이라 올렸으며,

    갑진년(1784년)에 존호를 흥인경지라 올렸다.

    기유년(1789년) 10월 7일에 수원 화산의 계좌(북북동) 언덕으로 무덤을 옮기고

    원호를 현릉원으로 고쳤다.

     

     
     
     

    예감(瘞坎)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瘞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 자 형태로 나무 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燒錢臺)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대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산신석(山神石)

     

    원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시설로 장례 후 3년간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

     
     
     
     

    신교(神橋)

     

    정자각에서 능묘로 이어지는 큰 석판으로 된 다리를 신교라 한다.

    정자각 뒤쪽에 있는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고,

    신문을 나온 혼백이 신교(神橋)와 신로(神路)를 따라 능침으로 향한다.

     
     
     
     

    장조(莊祖)와 헌경황후(獻敬皇后), 융릉(隆陵)

     

    장조(1735~1762)는 조선 21대 왕 영조와 영빈이씨의 아들이자 22대 왕 정조의 친아버지이며,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735년에 태어나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9년 15세 때부터 영조를 대신해 나랏일을 돌보는 대리청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장조는 아버지 영조와 관계가 좋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병을 얻었습니다.

    결국 1762년 왕세자 신분을 박탈당하고 뒤주에 갇혔다가 8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 부르고 양주 배봉산(현 서울특별시 휘경동)에

    수은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왕세손이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게 하여 훗날 왕위를 잇게 했습니다.

     

    1776년 정조는 22대 왕의 자리에 오른 뒤 친아버지의 무덤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을 높였습니다.

    정조는 1789년 영우원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새로 만들고

    이름을 현륭원이라 고쳤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이 1899년 11월에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장종이라 부르고 신주를 종묘에 모셨습니다.

    또한 현륭원도 격을 높여 융릉이라 고쳐 부르게 했으며,

    곧이어 12월에 다시 장종을 황제로 추존해 장조라 부르게 했습니다.

    이로써 사도세자는 죽은 뒤 아들 정조에 의해 왕릉에 버금가는 무덤을 가지게 되었고,

    고종 대에 이르러 세자에서 왕으로, 왕에서 황제로 지위가 바뀌었습니다.

     

    현경황후 홍씨(1735~1815)는 1744년 왕세자빈에 책봉되어 1752년 원손(훗날 정조)을 낳았습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이라 불리다가 1776년 정조가 왕이 되면서

    궁호를 혜경궁이라 하여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815년(순조 15) 세상을 떠나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함께 모셨습니다.

    1899년 사도세자가 왕으로, 또 황제로 신분이 높아짐에 따라 혜경궁도 헌경왕후,

    그리고 헌경황후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장조(莊祖)와 정조(正祖)의 가계도

     
     
     
     

    현륭원(顯隆園)

     

    현륭원은 정조가 1789년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을 풍수 좋은 곳을 찾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새로 지어 올린 이름입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분을 왕으로 높이고자 했으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현륭원을 왕릉에 버금가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대 황제가 된 고종은 직계 선왕들의 신분을 황제로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도세자를 왕으로 높여 장종으로, 현륭원은 융릉으로 높였으며,

    곧이어 장종을 다시 황제로 높여 장조라 했습니다. 이때 현륭원의 형태는 고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릉 공간 구성(朝鮮王陵 空間 構成)

     
     
     
     

    융릉(隆陵) -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의 능

     

    장조(莊祖, 1735~1762)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세 때인 1749년(영조 25)부터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등

    문제가 거듭된 끝에 1762년(영조 38) 왕세자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칭호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되었다가

    곧이어 다시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조라 하였다.

    헌경황후 홍씨(獻敬皇后 洪氏, 1735~1815)는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惠嬪)에 봉해졌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경궁(惠慶宮)이 되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회고록인 ‘한중록’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다가

    곧이어 황후(皇后)로 추존되었다.

     

    1762년 장조(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고

    이름을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 즉위 후에는 수은묘를 높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인 화산(花山)으로 옮겨 새로 조성하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현륭원의 정조의 명으로 특별히 격을 높여 조성하여

    봉분에는 모란과 연꽃을 조각한 병풍석을 두르고 무석인도 설치하였다.

    1815년(순조 15) 헌경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였고,

    1899년(광무 3) 원을 능으로 높여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조선왕릉 융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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