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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릉(健陵) -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황후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3. 23. 21:13

    조선왕릉 세계유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릉(융릉, 건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 유적임을 인정함.

    등재 일자 : 2009. 6. 30.

    유네스코 사무총장

     
     
     
     

    향나무 – 수령 140년(2008년 기준)

     

    Chinese Juniper, 측백나무과

    나무 속살에서 강한 향기가 나므로 향나무라 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서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향을 피우며, 여러 종교의식에도 널리 쓰인다.

    속살이 붉은빛을 띤 보라색이므로 흔히 자단(紫檀)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왕릉 숲길 미개방 안내

     

    12월 1일부터 익년 5월 15일까지는 동절기 안전사고 예방 및

    건조기 산불예방을 위하여 조선왕릉 숲길을 개방하지 않습니다.

     
     
     
     

    금천교(禁川橋)

     

    능역의 신성함을 구분 짓는 돌로 쌓아 만든 다리

     
     
     
     

    홍전문(紅箭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건릉(健陵) - 정조와 효의황후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황후 김씨(孝懿皇后 金氏, 1753~1821)의 능이다.

    정조는 추존 장조의 둘째 아들로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당파와 신분의 구분 없이 능력과 학문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학문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원래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追尊)되었다.

    효의황후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생전에 검소하게 지내어 순조가 잘 모셨다고 한다.

    1899년(광무 3년)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되었다.

    건릉은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릉원(융릉) 동쪽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풍수상 좋지 않은 땅이라고 하여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되었다.

     

     
     
     

    상설도 해설

     

    1. 곡장(曲墻) : 능상(園寢)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

    2. 석호(石虎) : 능(陵)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호랑이

    3. 석양(石羊) :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양

    4. 망주석(望柱石) : 봉분 좌우측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상부에 세호가 조각되어 있음.

    5. 난간석(欄干石) : 봉분 주위를 보호하기 위해 봉분 둘레에 설치한 돌난간.

    6. 능상(陵上) :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병풍석이 주위를 두르고 있음. 봉분(封墳)이라고도 함.

    7. 혼유석(魂遊石) : '혼령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이라고도 함.

    8 고석(鼓石) : 혼유석을 받치는 북 모양의 돌.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을 새겨 놓음.

    9. 장명등(長明燈) : 왕릉의 장생 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움.

                             석등은 팔각, 사각 형태로 하계 가운데에 배치함.

    10. 상계(上階) : 능침 공간을 장대석으로 구분 지어 두 단으로 나누었을 때 맨 위의 단.

                         봉분이 중심임. 삼면이 곡장으로 둘려 있음.

    11. 문석인(文石人) : 장명등의 좌우에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뜻에서

                               양손에 홀(笏)을 쥐고 서 있음.

    12. 하계(下階) :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이 서 있는 제일 아래 단.

    13.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을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長劍)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각.

    14. 석마(石馬) : 말의 형상을 조각한 돌. 무석인의 한 발 뒤에 서 있음.

    15. 예감(瘞坎) : 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묻거나 지방을 태워 묻는 곳.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함.

    16. 산신석(山神石) : 원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시설로 장례 후 3년간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

    17.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 공간의 중심적 건축물임.

                               정청(正廳)과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누어지며,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이 '丁(정)'자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함. 단청이 되어 있음.

    18. 수라간(水刺間) : 정자각 서남측에 있으며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거나 데우는 건물로 부엌이 있음.

    19. 비각(碑閣) : 비석이나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두는 곳.

    20. 참도(參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미터 정도의 돌길로 왼편이 신도(神道)이며,

                         오른편이 어도(御道) 임. 신도의 폭이 더 크며 높이도 약간 높음.

    21. 홍전문(紅箭門) :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또는 ‘신문(神門)’이라고도 함.

    22. 배위(拜位) : 헌관(獻官)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四拜) 함.

                         ‘판위(版位)’라고도 함.

    23. 금천교(禁川橋) : 능역의 신성함을 구분 짓는 돌로 쌓아 만든 다리.

     

     
     
     

    판위(版位)

     

    능의 출입문 격인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가로 세로 각 1.5m 정도의 사각형 자리가 있다.

    배위(拜位)라고도 하며,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제관(祭官)들이 도착하였을 때

    사배(四拜)로써 인사를 드리고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곳이다.

     
     
     
     

    향로와 어로(香路, 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박석(薄石, 얇은 돌)이 두 줄로 넓게 깔린 길을 말한다.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하였으나 문화재청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왜곡된 왕릉 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香御路)로 변경하였다.

    왼쪽은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 신(神)이 가는 길이라 ‘향로(香路)’라 하고,

    오른쪽은 제향을 드리러 온 왕 또는 제관이 가는 길이라 ‘어로(御路)’라 한다.

    좌측의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수라간(水刺間)

     

    정자각 서남측에 있으며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거나 데우는 건물로 부엌이 있음.

     
     
     
     

    정자각(丁字閣)

     

    건물 바닥 평면이 '정(丁)'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이 세 건물은 제향 봉행(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다.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향어로(香御路)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 않고 측면에 만든다.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의 신로(神路)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 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 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 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신교(神橋)

     

    정자각에서 능묘로 이어지는 큰 석판으로 된 다리를 신교라 한다.

    정자각 뒤쪽에 있는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고,

    신문을 나온 혼백이 신교(神橋)와 신로(神路)를 따라 능침으로 향한다.

     
     
     
     

    산신석(山神石)

     

    원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시설로 장례 후 3년간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

     
     
     
     

    예감(瘞坎)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瘞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 자 형태로 나무 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燒錢臺)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대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袝左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부좌)

     
     
     
     

    건릉 표석(健陵 表石)

     

    건릉 표석은 1900년(광무 4) 정조가 황제로 추존된 후

    기존에 세운 표석을 갈아서 다시 만든 표석이다.

     


    건릉 비문 역문(健陵 碑文 譯文)


    정조 경천명도홍덕현모 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는 개국 361년(壬申, 1752) 9월 22일 탄생하여

    기묘년(1759)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을미년(1775)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다.

    병신년(1776)에 왕위에 올라 경신년(1800) 6월 28일에 승하하였다.

    재위는 24년이고 나이는 49세이다. 

    같은 해 11월 6일에 화성 융릉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 해좌(亥坐, 북북서)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신사년(1821) 9월 13일에 융릉 오른쪽 산등성이 자좌(子坐, 북) 언덕으로 능을 옮겼다.

    광무 3년(己亥, 1899)에 존호를 경천명도홍덕현모라 올렸고,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선황제, 묘호를 정조라 올렸다.

     

    황후 장휘 예경자수 효의선황후 김씨는 개국 362년(癸酉, 1752) 12월 13일에 탄생하여

    임오년(1762)에 세손빈에 책봉되었고, 병신년(177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신사년(1821) 3월 9일 승하하였다.

    나이는 69세이다. 같은 해 9월 13일 건릉에 동봉(합장)으로 장사 지냈다.

    광무 3년(己亥, 1899)에 존호를 장휘라 올렸고,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선황후라 올렸다.

    전면과 음기(陰記, 표석 뒷면)를 공경히 써서 소자(고종)의 작은 정성을 표한다.

    광무 4년(1900) 어느 날

     

     
     
     

    조선왕릉 공간 구성(朝鮮王陵 空間 構成)

     
     
     
     

    정조(正祖)와 효의황후(孝懿皇后), 건릉(健陵)

     

    건릉은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황후 김씨(1753~1821)의 능이다.

    정조는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영조 35)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불명예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고 1776년 영조를 뒤이어 왕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짓고

    왕릉의 격으로 꾸며 지극히 모셨다.

    정조는 1800년에 세상을 떠난 뒤 정종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능은 평소 아버지 가까이 묻히길 원했던 뜻에 따라 현륭원 동쪽에 만들고 건릉이라 불렀다.

    그러나 1821년(순조 21) 왕비 효의황후의 능을 만들 때 건릉을 현륭원의 서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이 1899년 정종을 황제로 추존해 정조라 부르게 하고,

    건릉은 왕릉의 형식은 그대로 둔 채 표석만 황제릉의 내용으로 바꿨다.

    효의황후 김씨는 1762년(영조 38) 정조가 왕세손일 때 왕세손빈에 책봉되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821년 세상을 떠나 효의왕후로 불렀다.

    정조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으나 능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건릉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함께 모셨다.

    1899년 정조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효의왕후도 효의황후로 불리게 되었다.

     

     
     
     

    건릉(健陵) -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황후의 능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9년(영조 35)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75년(영조 51)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았고,

    다음 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학문 진흥에 힘썼고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 화성(華城)을 건축하는 등의 업적은 남겼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하였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정조로 바꾸었다.

     

    효의황후 김씨(孝懿皇后 金氏, 1753~1821)는

    청풍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영조 38)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며,

    정조의 후궁 소생인 왕세자(순조)를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황후로 추존되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릉원(융릉) 동쪽 언덕에 건릉을 조성하였다.

    1821년(순조 21)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을 때

    건릉의 원래 위치가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건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문석인과 무석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 역시 그대로 옮겨 사용하였다.

    융릉과 달리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조선왕릉 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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