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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10. 21:10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임청각

     

    임청각의 주인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에 힘썼던 사람들이다.

    안동 양반들이 벼슬보다 훨씬 더 명예롭게 생각하는

    유향좌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이 바로 임청각이다.

    한 가문이 그 명예를 500년이나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품위를 지키고

    어려울 때 주위를 돌보고 베푸는 정신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가진 자의 리더십을 기꺼이 발휘해 왔기에 가능했다.

    2017년 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임청각을 독립운동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칭송하였다.

    현재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 : Noblesse Oblige, 영어 : Nobility Obliges)란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지도층들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조상의 위패가 없는 사당(祠堂)

     

    이상룡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라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 현재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

    임청각처럼 유서깊은 종가의 종손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이 묵은 군자정(君子亭)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은 조선 중기인

    1519년(중종 14)에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양반 주택의 별당형 정자이다.

    건물의 둘레에 쪽마루를 둘러서 난간을 세웠다.

    출입구는 서쪽에서 내당으로 통하는 주인이 주로 이용하는 돌층계와,

    남쪽에 빈객들이 드나드는 돌층계를 별도로 구분해 만들었다.

    이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성장한 석주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정승이 태어난다는 우물방

     

    천지의 기운이 모인다는 우물방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물방은 진응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실제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방에서 출생했다.

    또 임청각의 평면도를 동쪽에서 보면 용(用) 자 형이다.

    이는 일(日) 자와 월(月) 자를 하나로 합한 것으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

    천지의 화합된 정기를 받고자 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집의 좋은 기운이 이들의 출생과도 무관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渡江(도강) - 압록강을 건너며

     

    朔風利於劒(삭풍이어검)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凓凓削我肌(율율삭아기) 내 살을 인정 없이 도려내네
    肌削猶堪忍(기삭유감인) 살 도려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腸割寧不悲(장할영부비)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沃土三千里(옥토삼천리) 기름진 옥토로 이루어진 삼천리
    生齒二十兆(생치이십조) 거기에서 살아가는 인구 이천만
    樂哉父母國(낙재부모국) 즐거운 낙토 우리 부모의 나라를
    而今誰據了(이금수거료) 지금은 그 누가 차지해 버렸는가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나의 밭과 집을 벌써 빼앗아 갔고
    復謀我妻孥(복모아처노) 다시 내 처자마저 넘보나니

    此頭寧可斫(차두영가작) 차라리 내 목이 베일지언정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出門未一月(출문미일월) 집을 나선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서

    已過鴨江水(이과압강수) 벌써 압록강을 건너 버렸네

    爲誰欲遲留(위수욕지류) 누구를 위해 머뭇머뭇하랴

    浩然我去矣(호연아거의)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아가리라

     

    1911년 음력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남긴 시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과 임청각 가문

     
     
     
     

    임청각 가계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임청각 매도 시도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사진

     
     
     
     

    석주 이상룡 연보

     

    1858년 (1세) 11월 24일 안동 임청각에서 출생

    1896년 (39세) 안동의진 지원

    1905년 (48세) 거창 가야산에 의병 근거지 구축

    1909년 (52세)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1911년 (54세) 만주 망명, 경학사 설립(사장)

    1916년 (59세) 부민당 단장

    1919년 (62세)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서로군정서 결성(독판)

    1924년 (67세) 남만주 항일운동 총괄 정의부 설립

    1925년 (68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취임

    1932년 (75세) 서란현(舒蘭縣) 소과전자촌(燒鍋甸子村)에서 서거

    1990년 유해 환국, 2009년 국적회복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임청각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또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그의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종숙 이승화 등도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상룡 일가는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군사조직과 군사력 양성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국내에서 계획하던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를 이끌며,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민족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932년 서란현 소과 전자촌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광복 45년이 지난 1990년 이상룡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 대전현충원에 모셨다가

    국립 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나라에서는 2009년 5월 25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아홉 분의 우뚝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분들이 태어나신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보물,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보물,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임청각은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1519년에 지은 집이다.

    '임청각'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는 구절에서

    임(臨)과 청(淸) 두 글자를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임청각은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많이 나온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만들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이 헐려 현재는 50여 칸이 남아 있다.

    임청각은 용(用) 자가 가로누운 듯한 평면 구성으로 되어 있다.

    남녀와 계층별로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군자정(君子亭)은 ‘丁’ 자 모양의 누각으로 된 별당 형식으로 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이곳을 찾은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가 지은 시들이 걸려있다.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난 집이다.

    이상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힘썼다.

    ※ 중채 :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집채

     

    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63 (법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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