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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동인씨(喬桐印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2. 6. 27. 04:06

    교동인씨(喬桐印氏) 유래

     

    교동인씨 시조는 신라 유례왕 14년 중원 대륙에서 신라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아찬벼슬과 태상박사를 제수받은 인서(印瑞)公 이시며,

    2세(世) 관(觀)公은 덕행이 높아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었다.
    신라 백제로부터 고려시대에는 이십여 분이 정승 반열에 오르고 오십여 분의 당상관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특히 고려 인종 때 33세(世) 인빈(印份) 공은 교동인씨 본관을 제수받은 득관조로

    이태백과 소동파에 비견되는 대 시인일 뿐만 아니라

    대학자로 한림학사, 문하시중(현 국무총리)을 하시고 교수부원군에 봉군되었다.
    39세(世) 인공수(印公秀) 공은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맞서 고려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고

    41세(世) 인당(印璫) 장군은 서북면병마사(현 군사령관)로

    고구려 옛 땅 회복을 위해 압록강 건너 원나라 기지를 격파하였다.
    인당 장군의 손자인 43세(世) 인원보(印原寶) 공은 판밀직사사(현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로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상도 함창으로 유배되면서

    우리 교동인씨 문중은 하루아침에 고려 시대 명문가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위해 크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고 명맥만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국권을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에는 60세(世) 한수공, 60세(世) 시봉공, 60세(世) 진명공 등이

    항일 독립의사로서 우리 가문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는 61세(世) 태식공이 재무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18개파 2만여 종원들이 교육계, 관계, 산업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군,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선조님들께서 쌓아온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 뿌리공원로 47 (안영동) 중구 효문화마을관리원 뿌리공원 內

     

     
     
     

    교동인씨 상징 조형물

     

    작품명 : 천년의 비상

    작가 : 천종권

     

    명심보감과 동국통감에 수록되어 자녀 교육의 덕목으로 삼은 청렴한 선비의 덕행과

    명 시인을 배출한 교동인씨 가문의 업적을 고서의 형태로 작품을 구상하였다.

     
     
     
     

    雨夜有懷(우야유회) - 비 오는 날 밤의 감회

     

    草堂秋七月(초당추칠월) 초당 가을 칠월에

    桐雨夜三更(동우야삼경) 오동잎 듣는 비 밤은 삼경인데

    欹枕客無夢(의침객무몽) 베개에 비긴 나그네 꿈 못 이루고

    隔窓蟲有聲(격창충유성) 창밖엔 들리거나 벌레 소리

    淺莎翻亂滴(천사번란적) 얕은 잔디는 어지러이 젖어 번득이고
    寒葉酒餘淸(한엽주여청) 싸늘한 잎 비 맞고 말쑥하네
    自我有幽趣(자아유유취) 나에게도 그윽한 자취가 있어
    知君今夜情(지군금야정) 그대의 오늘 밤 심경 알겠네

     

    인빈(印份) 作 -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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