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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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 추모비(仁村 金性洙 先生 追慕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8. 20:07
仁村 金性洙 先生 追慕碑(인촌 김성수 선생 추모비) 인촌 김성수선생 추모비(仁村 金性洙先生 追慕碑) 선생의 호는 인촌(仁村)이요, 본관은 울산(蔚山)이니 조선조 중종 때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13대손으로 1891년 10월 11일(음력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국권을 빼앗긴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혼란 속에서도 항상 나라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굳건하게 키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선생은 교육자, 언론인, 기업가, 정치가로서 크나큰 공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참된 민족정신과 지도자를 육성하는 교육사업에 가장 큰 정성을 기울였다. 儒學(유학)의 전통이 깊은 명문의 후예로서 선생은 일찍이 신학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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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의 상징 호랑이상(虎像, 호상)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5. 19:05
호상 비문(虎像 碑文) - 조지훈 民族(민족)의 힘으로 民族(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民族(민족)의 보람찬 大學(대학)이 있어 너 恒常(항상) 여기에 自由(자유)의 불을 밝히고 正義(정의)의 길을 달리고 眞理(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地軸(지축)을 박차고 咆哮(포효)하거라 너 불타는 野望(야망) 젊은 意慾(의욕)의 象徵(상징)아 宇宙(우주)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民族(민족)의 소리 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氣槪(기개) 너의 志操(지조) 너의 叡智(예지)는 祖國(조국)의 영원한 鼓動(고동)이 되리라. ※ 호상 비문은 당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글을 썼으며. 이 글은 2003년 '민족의 아리아'라는 이름의 곡으로 만들어져 고려대학교 응원가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고려대학교 응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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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雙忠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4. 21:09
鎭撫中軍 魚公在淵 殉節碑(진무중군 어재연 순절비)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 보기를 돌아가는 것 같이 했네. 幼學 魚公在淳(유학 어재순)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백세토록 풍교의 울림이네 廣城把守殉節碑(광성파수순절비) 本營千總 金公鉉暻(본영천총 김공현경) 本鎭別將 朴公致誠(본진별장 박공치성) 천총의 장이 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드리웠고, 하늘이 내려준 성품이요 딸의 신령으로 호걸스럽도다. 장애를 딛고서서 지킴이 있어야지 구차히 산대서야 어찌하냐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나의 칼날 이미 갈았도다. 裨將 李公玄鶴(비장 이현학) 막부의 빈려 군사로 그대 병기를 편 뒤로 위태로이 홀로 살지 않으니 공의 이름이 회복되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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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仁村 金性洙 先生 銅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4. 20:16
銅像(동상) 高(고, 높이) 3.424m 金景承 彫刻(김경승 조각) 閔福鎭 助手(민복진 조수) 銅像建立文(동상건립문) 校友會長 李丙壽 撰(교우회장 이병수 찬) 財團 主務理事 李活 書(재단 주무이사 이활 서)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건립문(仁村 金性洙 先生 銅像 建立文) 민족 자립의 대본(大本)이 첫째 교육에 있음을 깨닫고 일제의 억압과 싸워가며 이 사업을 완수한 이는 곧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선생의 사업이 허다(許多)하지만 특히 교육은 그가 지상 사명으로 삼아 물심을 기울여 일생을 여기에 바쳤던 것이다. 선생은 본시 고창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마치고 돌아오자 단기 4248년(1915년) 중앙학교를 맡아 일익 확장(日益擴張), 다시 그 경영을 반석 위에 놓고자 4262년(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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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 향토유적, 홍덕문 추모비(洪德文 追慕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3. 22:16
愛國志士 洪德文 先生 追慕碑(애국지사 홍덕문 선생 추모비) 愛國忠情(애국충정) 石面刻銘(석면각명) 老人會意(노인회의) 邑民至誠(읍민지성) 獨立萬歲(독립만세) 群衆先鋒(군중선봉) 拷問極刑(고문극형) 百折不屈(백절불굴) 愛國志士 南陽洪公德文之墓(애국지사 남양홍공덕문지묘) 동두천시 향토유적, 홍덕문 추모비(洪德文 追慕碑) 홍덕문은 구한말의 지사(志士)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일명 만세 대장으로 불리는 홍덕문 지사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해 음력 2월 25일 장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렸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형독(刑毒)으로 인하여 수년 후 지금의 걸산동에서 타계하셨다. 그 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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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선언문(大韓獨立軍 宣言文)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2. 22:11
대한독립군 선언문(大韓獨立軍 宣言文) 자기의 조국, 자기의 동족을 잔해하여 이족에게 충성하는 자는 천인의 공노를 초래함은 물론이요. 자신 역시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나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상당히 생각되는 바 있고 죄책을 깨달을 것이다. 아 아… 천하에 어찌 이족을 위하여 동포를 잔해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고 사명일 것이냐… 우리는 지금 도수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려고 의군을 일으켰다. 이때를 당하여 그대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역시 적과 동일시할 것이다. 우리 어찌 동포를 해하는 것이 좋아서 할 것인가 독립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다. 대한민국 이년 일천구백이십년 삼월 대한독립군 특고문중 순사보조원에 대한 경고문 (대순진리회 증)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남화리)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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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2. 19:11
보물,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世宗 英陵 神道碑)는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신이 심하게 부식되어 표면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비문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수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조각되었다. 1469년(예종 1)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石物)을 묻었다. 1691년(숙종 17)과 1738년(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 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 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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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0. 22:10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무명용사비는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군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1823~1871)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19세기의 구미 열강은 우리나라를 약소국가로만 생각하고 선교사나 탐험대를 내세워 무단 입국을 기도하는가 하면 해군 함대를 출동시켜 문호 개방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면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의 연안 포구에 함포 사격을 가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니 병인(丙寅), 신미(辛未) 두 양요(洋擾)와 운양호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 도발을 받을 때마다 애국심에 불타는 강화도 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