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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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상(世宗大王 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0. 19:12
세종대왕 상 이전 기념비(世宗大王像 移轉 紀念碑) 세종대왕은 단기 3730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한양 준수방에서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어 스물두 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모셔져 3783년 4월 8일(음력 2월 17일) 쉰네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서른두 해 동안 백성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며 신의를 중히 여기는 도덕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고도의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연구에 직접 참여하시고 주의 깊게 살핌으로써 훈민정음 창제 반포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도덕, 예술, 의학, 군사, 외교 등 그 어느 방면할 것 없이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시어 꽃피웠으며 겨레의 생존발전에 영구히 다함없는 은덕을 끼치신 배달 겨레의 가장 위대한 성왕이시고 인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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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스승 묘비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8. 19:09
한힌샘 상주 주시경 스승의 무덤 주시경 선생은 자신의 호 백천(白泉)을 순수한 우리말 이름인 ‘한힌샘’으로 지어 부른 것으로 유명했다. 4209.11.7 황해도 봉산군에 나서 4247.7.27. 서울 내수동에서 죽다. 4293(1960년). 10. 1 서대문밖 고택골서 이곳에 옮겨 모시다. 아들 : 삼산, 백산, 왕산 딸 : 송산, 춘산 손자 : 영철, 영일, 영석 손녀 : 영진, 영옥, 영애, 소영 외손 : 이완영, 고관주 외손녀 : 이옥희, 이옥련, 고경애 주시경 스승 묘비 주시경(周時經) 스승은 서기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말 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 운동을 하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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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7. 23:0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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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기당 현상윤 선생상(幾堂 玄相允 先生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5. 19:17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기당 현상윤 선생상(幾堂 玄相允 先生像) 기당 현상윤 선생(幾堂 玄相允 先生)은 1893년에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早稲田(조도전, 와세다) 大学(대학)에 재학 중 소설 등으로 新文學(신문학) 운동을 일으켰다. 중앙중학교 敎師(교사) 시절인 1919년 선생은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3.1 운동을 계획, 48인의 하나로 손병희(孫秉熙), 이승훈(李承薰) 및 普專 校友(보전 교우) 주익(朱翼)과 강기덕(康基德) 등 수많은 인원을 동원,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일로 선생은 20개월 동안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직후 선생은 普成專門學校專 校長(보성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高麗大 初代 總長(고려대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朝鮮儒學史(조선유학사), 朝鮮思想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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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대선사 어록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3. 20:18
만해 한용운 대선사 어록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은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으로서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으므로 평등은 자유의 상대가 된다. 따라서 위압적인 평화는 굴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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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이용익 선생상(忠肅公 李容翊 先生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1. 21:19
忠肅公 李容翊 先生像(충숙공 이용익 선생상) 충숙공 이용익 선생(1854~1907)은 舊韓末(구한말) 內藏院卿(내장원경), 度支部(탁지부), 軍部大臣(군부대신)을 역임한 함경북도 明川(명천) 出身(출신)으로 普成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를 創設(창설)하니 때는 多難(다난)한 光武(광무) 9년(단기 4238년, 서기 1905년)이었음. 그해 7월 俄京(아경,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亡命(망명), 4242년 1월 海蔘威(해삼위, 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客死(객사), 享年(향년) 56세, 遺疏(유소) 「請(청) 廣建學敎(광건학교), 敎育人材(교육인재) 以復國權(이복 국권)」을 傳(전)함. 선생의 遺志(유지) 및 母校創建(모교창건)의 恩功(은공)을 길이 贊揚(찬양) 코자 이 像(상)을 세움. 檀紀(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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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弘巖 羅喆) 선생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1. 19:12
나철(羅喆, 1863~1916)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나주.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오(吳基鎬:1865~1916)· 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하자"는 내용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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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공 김사혁 전적비(忠節公 金斯革 戰蹟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0. 20:12
高麗上元帥諡忠節公金斯革戰蹟碑(고려상원수시충절공김사혁전적비) 흑성산 해발 519m 흑성산(黑城山)의 유래 상왕산(象王山), 검은성(儉銀城)이라고도 불렀으며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 하여 신성시하던 산이다. 충절공 김사혁 전적비(忠節公 金斯革 戰蹟碑) 신라 삼국통일의 영주인 태종대왕의 6세손 주원공이 강릉김씨 시조 명주군왕이며 19세손으로 1320년 개성에서 탄생하시다. 고려 말엽 북에서 홍건족(紅巾賊), 남서쪽에서 왜적이 침범하여 국운이 위난함에 남정북벌에 몸 바쳐 수훈을 세우시고 생민을 전란에서 구하시였으며 1383년 왜구 28소를 참하시고 잔장을 이곳 흑성산에서 완전 섬멸하시다. 진천 백곡에 은퇴하시어 1384년 10월에 서거하시니 일생을 애국 애족하시고 의와 절로 살신성인하신 충절공(忠節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