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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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2. 1. 1. 20:16
연개소문(淵蓋蘇文) ○ 생존기간 : A.D 594년(?) ~ 666년 (삼국사기) ○ 주요 직위 : 고구려 대막리지(太莫離支), 조의선인(皁衣先人) ○ 주요 업적 - 수(隋)나라를 이어 중국의 통일왕조로 새로이 등장한 당나라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기 위하여 642년(영류왕 25년) 천리장성 축조 감독 - 홀로 장백산에 들어가 칼 솜씨를 닦은 지 수년 만에 고금에 드문 도선(刀仙)이 되니 따르는 무리가 수없이 많은 당금무배(當今無輩 : 당대에 당할 자 없는 仙輩)가 되었고, ‘김해병서(金海兵書)’라는 유명한 병서를 남김. - 선도문화를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이 투철했던 고구려 명장으로서 당 태종(唐 太宗)이 이끈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승리함 - 중국의 도교 등 외래사상의 유입을 경계하고 한민족 고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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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호로고루(瓠蘆古壘)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5. 20:10
연천 호로고루 동벽 호로고루 동벽은 평지로 이어져 적의 침입이 쉬운 성의 동쪽 부분을 방어하는 성벽이다. 성벽은 높이가 10m이고 아랫부분의 폭이 40m, 길이가 90m에 달할 정도여서 마을 주민들이 성이 아니고 재미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웅장하다. 동벽을 만드는데 들어간 흙과 물의 양이 대략 15,996㎥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난 토목 공사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 동벽은 고구려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었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어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자 신라가 점령하여 사용하였다. 신라군이 점령할 당시 호로고루 동벽은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성벽 곳곳이 무너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라군은 고구려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붙여 쌓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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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4. 20:15
북에서 온 광개토대왕릉비 이 광개토대왕릉비는 2002년 북한에 소재한 국보급 고구려 유물 및 벽화고분을 북한에서 직접 모형으로 제작해 우리나라에 제공한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의 결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민간의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을 주도하며 이 비를 소장하고 있던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민화협)는 2015년 연천군에 이 비를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연천군은 고구려의 기상을 되새기고 남과 북의 통일과 화합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남한 지역을 대표하는 고구려유적인 연천 호로고루(사적 제467호)에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영토를 많이 넓힌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현재 중국 지린성 퉁거우 지역)에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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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 동상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1. 13. 19:10
을지문덕(乙支文德, 생몰년 미상) - 고구려 대장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는 그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저술인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후대의 기록이므로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612년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수나라 별동대(別動隊) 30만을 격멸시킨 이른바 살수대첩을 거둬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하고 불세출의 명장(名將) 반열에 올랐다.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는 양제(煬帝)의 총지휘 아래 대규모의 군단을 편성해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 육군은 고구려의 주요 군사거점인 요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