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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 - 사적 제11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1. 23. 03:44
서울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 - 사적 제11호
한성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풍납동토성
풍납토성 내부에는 중요한 유구들과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백제 한성기 최초의 도로유구,초대형 수혈건물지(면적 344㎡),
백제 최초의 지상식 기와 건물지는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특히 경당 연립 재건축부지에서는 呂자형 건물지 주변에서 ‘大夫(대부)’, ‘井(정)’자 등이 새겨진 항아리와 함께
다수의 말머리뼈가 출토되어 국가제사와 관련된 신전유구로 추정된다.
풍납리토성사적비(風納里土城事績碑)
서울지하철 8호선 천호역(풍납토성역) 만남의 광장
서울지하철 8호선 천호(풍납토성)
풍납토성 성벽 단면
백제 초기 왕성인 풍남토성의 단면을 떼어(전사) 설치한 토층이다(2011년 발굴). 현
재 남아있는 성벽을 기준으로 아랫변 43m, 윗변 13m, 높이 11m로 추정 복원하였다.
왼쪽이 안쪽 성벽이고 오른쪽이 바깥쪽 성벽이며, 성 바깥쪽으로는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1차 성벽으로 표시한 부분은 가장 먼저 쌓은 것이며, 차례로 2차, 3차 성벽을 덧쌓았다.
교란층은 성벽이 무너지면서 위에서 을러내린 흙이 쌓인 층을 말한다.
복원층은 원래의 성벽높이를 추정하여 표시한 층이다. 맨 아래쪽의 색깔이 다른 부분은 생토층이다.
1차 성벽을 쌓을 때 성벽보호를 위해 표면을 덮은 강돌이 안팎에 남아 있고,
3차 성벽을 쌓을 때 만든 기단석과 축대가 성 안쪽 바닥에 남아 있다.
1차, 2차, 성벽을 쌓을 때 만든 배수로가 있고, 3차 성벽 재수로는 성벽 안쪽으로 더 들어간 곳에 있었을 것이다.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
한강 옆 평지에 쌓은 토성으로서 지금은 2.1km구간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둘레 약 3.5㎞였을 것으로 밝혀졌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성벽 윤곽은 마치 나룻배처럼 생겼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에 걸친 동쪽 성벽을 발국 조사에 따르면 성벽의 아랫변은 너비 43m, 높이 12m이상이며,
매우 복잡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쌓았다.
성벽의 윗변 너비를 15m, 높이를 12m라고 가정하면,
고대사회에서 이처럼 거대한 사다리꼴 성벽을 다져쌓는 공사는 국가의 온 힘을 쏟아 붓는 일이었다.
192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중국제 청동제초두(靑銅製鐎斗), 허리띠장식(과대금구, 銙帶金句) 등을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알려졌고, ‘바람드리(풀납, 風納)’란 지명 때문에 ‘사성(蛇城, 배암드리)’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 안 4m 깊이에서 백제왕궁의 일부로 보이는 각종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등이 발견되었으며,
각종 그릇, 벽돌, 기와, 토관, 장신구 등 귀중한 유물 수 십 만점이 출토되었다.
1936년 조선고적 제27호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1호로 지정된 후
1976년~1978년에 북쪽 성벽구간을 복원하는 등 보존ㆍ관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한성백제의 왕성한 사학자의 기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다.
백제는 한반도의 고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해양국가입니다.
한성백제는 백제의 700년 역사 중 약 500년간 서울(한성)에 수도를 두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왕성인 ‘위례성’을 건축하고 풍요롭게 살며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 피웠습니다.
그러나 5세기 말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그 후 ‘위례성’은 폐허로 방치되어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잊혀 갔고,
점차 그 흔적마저 땅속에 묻혀 한성백제의 시대는 그렇게 잃어버린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 후 1,600년 동안이나 지하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1997년 우연히 발견됩니다.
풍납동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포크레인에 훼손되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한성백제의 왕성 유적을 한 사학자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후 국가적인 차원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발굴 과정에서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이며
백제의 위대한 건축기술이 반영된 유적지란 학설이 힘을 얻게 되었답니다.
백제의 역사를 통해 서울은 로마, 아테네에 버금가는 2,000년 역사를 간직한 역사고도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서울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 - 사적 제11호
한강 남쪽에 위치한 초기 백제의 성곽이다.
1925년 대홍수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 토성의 성격에 대해 왕성이라는 견해와 단지 방어성일 뿐이라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왔다.
1997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왕궁 터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이 토성은 백제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처음 도읍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올린 판축 토성으로, 너비 43m, 높이 11m이다.
원래는 둘레 3.5km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2.1km 정도 남아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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