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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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龍頭墩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5. 20:10
손돌목(孫乭項, 손돌의 한숨, 손돌의 추위)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 鹽河)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년(1627)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孫乭)이 길 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짚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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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광성보 광성포대(史蹟, 廣城堡 廣城砲臺)카테고리 없음 2022. 1. 1. 19:12
사적, 광성보 광성포대(廣城砲臺) 광성포대는 조선 후기 강화도 해안 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중에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 내에 내성, 외성 12 진보(鎭堡) 54 돈대(墩臺)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砲座)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 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외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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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강화 광성돈대(江華 廣城墩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31. 19:09
대포(大砲) - 홍이포(紅夷砲) 구경 100mm, 길이 215cm, 중량 1,000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 장전식 화포(砲口 裝塡式 火砲)로서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소포(小砲) 구경 84mm, 길이 119cm, 중량 171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 장전식 화포(砲口 裝塡式 火砲)로 사정거리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불랑기(佛狼機) 구경 26mm, 길이 78.2cm, 중량 38kg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火繩砲)로서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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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손돌목 돈대(孫乭項 墩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29. 20:09
강화해협 건너편의 손돌 묘(김포)가 있는 덕포진 - 손돌목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帥字旗) 수자기를 최초로 끌어내린 퍼비스 일병(왼쪽)과 그를 도운 브라운 상병(오른쪽)이 총을 짚고 서 있다. 당시 노획된 수자기는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점령당한 후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1871. 6. 11)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써 미군 측에서는 맥키(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 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릐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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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雙忠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4. 21:09
鎭撫中軍 魚公在淵 殉節碑(진무중군 어재연 순절비)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 보기를 돌아가는 것 같이 했네. 幼學 魚公在淳(유학 어재순)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백세토록 풍교의 울림이네 廣城把守殉節碑(광성파수순절비) 本營千總 金公鉉暻(본영천총 김공현경) 本鎭別將 朴公致誠(본진별장 박공치성) 천총의 장이 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드리웠고, 하늘이 내려준 성품이요 딸의 신령으로 호걸스럽도다. 장애를 딛고서서 지킴이 있어야지 구차히 산대서야 어찌하냐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나의 칼날 이미 갈았도다. 裨將 李公玄鶴(비장 이현학) 막부의 빈려 군사로 그대 병기를 편 뒤로 위태로이 홀로 살지 않으니 공의 이름이 회복되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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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 강화 광성보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1. 12. 21. 22:08
辛未洋擾戰亡將兵侍郞 殉節墓壇(신미양요전망장병시랑 순절묘단)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신미 순의총은 조선 고종 8년(1871년, 辛未洋擾) 4월 23일 광성보(廣城堡) 일대에서 미 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덕성리) 강화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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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20. 22:10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무명용사비는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군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1823~1871)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辛未洋擾 殉國 無名勇士 碑(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 비) 19세기의 구미 열강은 우리나라를 약소국가로만 생각하고 선교사나 탐험대를 내세워 무단 입국을 기도하는가 하면 해군 함대를 출동시켜 문호 개방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면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의 연안 포구에 함포 사격을 가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니 병인(丙寅), 신미(辛未) 두 양요(洋擾)와 운양호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 도발을 받을 때마다 애국심에 불타는 강화도 수성..